본문
작고문인심포지엄
* 일시 : 2010년 11월6일 오후 3시
* 장소 : 경남문학관 세미나실
* 대상문인 : 조유로 아동문학가
* 주제발표 : 황선열 문학평론가
* 회고담 : 임신행 아동문학가
* 동시낭송 : 최영인
* 시조낭송 : 김진희, 신승희
* 기타연주 : 하태영 (음향엔지니어, 밴드<로지라인>활동)
캐논 - 엽기적인 그녀 ost,
with a thousand flowers
조유로 아동문학가
조유로는 1930년 11월21일 경남 창녕에서 출생하였고, 영산소학교, 경남중학교를 나와 동아대학 법학부 법률학과를 중퇴하였다. 1957년 <자유신문>에 시 「굴뚝의 윤리」가, 1958년 <자유신문>신춘문예에 시조로 등단하였으며, 초, 중, 고 교원, 대학강사, 신문, 잡지기자, 서울 MBC문화방송(주) 본사 상임기획위원, 부산MBC문화방송(주) 부설 가야문화연구소 자문위원, 부산시청소년선도협의회 초대 사무국장, 아동문학분과위원장, 예총 부산지부 창설 상임감사, <새문학>주간을 지냈다.
작품집으로는 시집『부동항』, 『하이얀 칠판』, 『산 넘어온 편지』, 『제목이 없는 동시』, 『씨씨한 시집』, 『노리개 실은 화물선』, 『고만큼 조만큼』, 『부산 부두에 오면』,
『그래요 그래서』, 『낮달은 없어도 해는 갔더라』, 『그 달이 방금』등이 있고 창작동화집으로 『시인 아저씨와 흰 곰』이 있다. 그 외 편저 한국 동심문학대표작가선집 『해바라기의 합창』, 공저『한 알의 밀알』이 있다. 제6회 이주홍아동문학상(동시「소는 소는」, 1986)을 수상하였다.
동시낭송
그래요 그래서
조유로/낭송 최영인
사이좋게
내려요
사이좋게
비껴나요
비 아기
신나는 뜰을 보셔요
앞서 내린
빗방울
비껴 난
자리
고 자리
내리고
비껴나고
내려요
고 마음
되되푸리
사이좋게
비 동무
그래요
그래서
비오는 소리
사이좋게
--또
사이좋게
--닥!
셋 房
曺有路(조유로) /낭송 김진희
한 자리 住所는 지웁고나
그래, 단문 셋房은 편하지
그런 대로 홀랑 이사를 하고
此際(차제), 한 자리 사랑도 지웁네
그래, 자잘그래 하찮은 가구같은
사랑의 이야기는 장만치 말고
그래 저래, 몸 셋房 마음 貰房으로
흘러 다니다가
나의 頂上에는 눈이 내리네
더러는 이런 약속도 하여 보았지
단촐한 이사의 첫날 밤쯤은
이제 이곳은 나의 棺家(관가)라
잠시는 오랜 꿈을 꾸었지,
자주는 또 그런 다짐도 하였네
우리의 距離(거리)가 아주 다가왔을 때
인자는 여기가 나의 사랑의 終家(종가)라
오래는 잠시 꿈도 보았네
그러나 나를 맞은 주인은 두 사람이었네
잠시 반김과 오랜 지움을 잣는.....
그때 나를 사랑한 사람은 꽃이었거든 !
滿了(만료)滿開(만개)한 꽃이었거던 !
지우면 홀랑 이사를 하고
외로우면 그래, 훌쭉 떠나도 보는
그래 저래 셋房은 편한거라
싸전에는
조유로/낭송 신승희
싸전에는 하루를 노을이 핀다
좁쌀은 좁쌀끼리 콩은 콩대로
저마다 글썽글썽 노을이 핀다
우는 아기 돌 날 을 업은 엄마가
좁쌀한번 콩 한번 만져보다간 돌아 서면
싸전에는 아침에도 피는 저녁놀
싸전에는 한 밤도 노을만 피나
빈 지게 무겁다 늙은 아저씨
보리 한번 가루한번 만져 보다간 돌아서면
보리는 보리대로 가루는 가루끼리
일렁일렁 노을보다 진한 눈 노을
방법론 연구
- 황선열(문학평론가)
Ⅰ 서론
문학이 인간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독자들에게 언어로써 감동을 주는 것은 그 언어의 기교에서도 있지만, 언어가 주는 진솔한 소통의 과정에도 있다. 기교가 먼저냐 감동이 먼저냐를 놓고 시시비비를 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교가 감동을 주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용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교가 기교에 머물면서 스스로 그 기교주의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위안으로서의 문학’에 머물 공산이 크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90년대 이후 우리 문학에 몰아닥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서 발겨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숱한 에피고넨을 남기면서 심각한 병리 현상을 초래했다. 그 여파가 21세기 한국문학에서 여전히 ‘미래파’ 문학이라는 또다른 장르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볼 때, 그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언어 예술이고, 그것은 기호와는 다른 측면의 소통수단이다. 기호가 상징의 측면이 강하다면, 언어는 소통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기호와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음성의 기표로서 언어기호는 고도의 비유를 구사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문학이 다른 예술 장르와는 다르게 독특한 영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언어 예술이라는 특징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언어 예술이라는 본질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문학이 언어 예술의 본질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교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자율적 소통 부재’가 필요한 시대이거나, 혹은 ‘타율적 소통 부재’가 조장되고 있는 시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유로의 ‘동심파’ 문학은 어떤 소통 부재 때문에 일어난 문학이었을까. 1930년대 초현실주의는 일제의 폭압적 위력이 작용하여 ‘타율적 소통 부재’가 조장되던 시대에 일어난 문학운동이었고, 1950년대 후반기 동인의 후기 모더니즘 운동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존재의 위기의식이 어느 때보다 가중되던 시기에 일어난 ‘자율적 소통부재’의 문학운동이었다.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은 자본의 압제 속에서 인간 존재가 말살되고 있다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의식으로부터 일어난 ‘타율적 소통 부재’의 문학운동이었다. 조유로의 ‘동심파 시’는 어떤 소통 부재의 상황 속에서 일어난 형식적 실험운동이었을까. 그의 시를 말하는 자리에서 가장 먼저 논해야 할 문제는 이러한 ‘동심파 문학’의 향방이다. 조유로의 시는 언어의 해체와 기호의 도입과 같은 극단적 실험형식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는 형식과 내용의 방법론적 일탈을 꾀하고 있다. 이것은 문학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그의 문학은 ‘언어의 감옥’에 갇혀서 그 이상의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한 채 미완의 실험문학으로 끝나고 말았다고 할 수도 있다.
두 번째 문제는 형식의 실험이라는 기교의 경계를 넘어서 문학의 본질인 소통과 감응의 측면을 얼마나 꾀하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기교는 문학의 본질에 충실한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 형식을 강조하다가 내용을 도외시하는 것은 결국 자기 위안의 문학으로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조유로의 ‘동심파 시’는 이러한 자기 위안의 문학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든다. 문학은 한 시대의 등가물이고, 그 시대의 범주 속에서 형식의 실험과 새로운 문학적 대응 방식이 일어난다. 조유로는 제1시집 이후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론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을까. 그런 시도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서 조유로의 시세계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Ⅱ 본론
그동안 조유로에 대한 연구는 거의 미미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전체 11권의 시집을 내고, 1957년부터 2004년까지 50여년 간 문학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에 대한 평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1)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문학을 새롭게 살펴보는 것은 그의 문학이 지닌 공과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문학의 지닌 한계점을 통해서 오늘 우리 문학의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유로 문학의 연구는 그 미완성의 측면을 살펴봄으로써 그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1. 약력과 생애2)
조유로(曺有路)는 1930년 11월 21일 경남 창녕군 도천면 1리 532번지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8대조인 조명욱은 경기도 광주 추현면에 살았으나, 이천부사로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을 만나 순절하고 만다. 이 때문에 증조부인 조병문은 식솔을 이끌고 도천면으로 이사를 하고 조유로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이름난 학자였으며, 2권의 시집을 남길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고 한다. 부친 조규철은 부산 한시회 회장을 역임한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부친은 조유로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인 일제 말기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구 휘하에 있다가 광복 후 귀국하였으며, 임정기관인 ‘재중한인 재산반입위원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모친인 김학수는 김녕김씨 집안 출신으로 검소와 절약으로 창녕의 부잣집으로 불릴 정도로 가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조유로의 아명은 은동(銀童), 호적명은 경현(庚鉉), 자는 천필(天弼), 유로(有路)는 필명이다. 그는 3세 때 한문으로 주소를 쓸 정도로 영민했다고 한다. 그를 ‘조창녕(曺昌寧)’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그것은 창녕의 이름난 천재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는 덩치는 작았지만 늘 가난한 아이들 편에 섰다고 한다. 8세 때 영산소학교에 입학하고, 일제강점기 교육을 받았다. 영산소학교 4학년 때 창녕군에서 실시한 세금에 관한 글짓기 공모에서 1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해방 후 그는 마산상업 3년을 졸업하고, 경남중학 4학년으로 편입했다. 이때『경향신문』창간기념 전국 중등학생 논문제상모집에서 3등으로 당선되었다고 한다. 이후 조유로는 경남고를 졸업하고(1949년), 정인보의 특청으로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고, 동아대 법학과를 다녔다. 여기도 중퇴하고, 1949년부터 51년까지 진해, 마산, 충무시 등지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한다. 군복무(1951-1952)를 마치고, 1955년 초중등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신지대’ 주재인으로 시작활동을 한다. 1957년『자유신문』신춘문예에「굴뚝의 윤리」가 수석 입선되면서 등단한다. 그해 KBS 서울 중앙방송 신춘문예에 방송극「이북은 살아있다」가 당선되고, 1958년『자유신문』신춘문예에 동화,『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각각 당선되었다. 1958년에는 첫 시집『부동항』을 상재하고, 이어서 제2시집『하아얀 칠판』(1961), 제3시집『산 넘어 온 편지』(1963), 제4시집『제목이 없는 동시』(1964), 제5시집『씨씨한 시집』(1965), 제6시집『노리개 실은 화물선』(1966), 제7시집『고만큼 조만큼』(1967), 제8시집『부산 부두에 오면』(1972), 제9시집『그래요 그래서』(1974), 제10시집 『나달은 없어도 해는 갔더라』(1981), 제11시집『그달이 방금』(1989) 등을 상재한다. 창작집으로『시인 아저씨와 흰 곰』(1968)이 있다.
이 중에서 첫 시집『부동항』과 창작 동화집『시인 아저씨와 흰 곰』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심파’ 시집이다. 첫 시집 이후부터 ‘동심파’ 시집을 발간하면서 그는 끝까지 ‘동심파’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했던 것이다.
2. 모더니즘 방법론의 한계
1950년대 모더니즘 운동은 메를리 퐁티의 현상학과 사르트르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입었다. 인간 존재는 세계로부터 외면당하고,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을 무자비하게 죽음의 세계로 몰고 간 전쟁을 체험하면서 실존의 문제는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문학이 담당해야 할 몫도 현실에서 실존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에 있었다. 사르트르의『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이 시대의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실존주의의 항변이었다.
조유로는 1950년대 중반에 시, 동화, 시조로 등단한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현실은 문학의 순수성을 지향하기에는 너무도 벅찼다. 물론 이것은 그의 천성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격동의 시대 상황을 체험했던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3) 조유로는 시로 등단을 했지만, 동화, 시조, 동시로 영역을 확장해간다. 이것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의 문학 경향이 처음부터 실험 정신에서 출발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 정신은 그의 시가 모더니즘 시의 방법론을 보여주고 있다는데서 알 수 있다. 조유로가 문단에 등단하는 1950년대 중반은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전후 문학의 경향을 농후하게 드러냈던 때이다. 이러한 경향을 보인 ‘후반기 동인’의 모더니즘 시운동은 현실의 문제로부터 벗어나려는 문학적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혼란된 시대 상황 속에서 비판을 칼날을 세우기도 하고, 순수 문학의 자세의 돌아가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조유로의 등단작「굴뚝의 倫理」는 이러한 모더니즘 시운동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굴뚝이 높은 것은 / 저만큼 누구가 싫어진 게다 // 빨간 핏덩어릴 태우듯 / 흡사 너는 火葬幕 煙塔! // 觸角을 亡失한 나비떼들이 / 한 해를 파아래 온 하늘을 饗宴하면 / 都市는 隔離된 / 머언 流配地 // 항시 神의 憤怒를 戱弄하던 / 避雷針의 날카론 監視 아래 / 生命은 저렇듯 / 商品으로 쌓여 갔는데 // 굴뚝이 높은 것은 / 저만큼 人價가 낮아진 證據다.
-「굴뚝의 倫理」전문4)
이 시에서 실존이 존재하는 곳은 현실과 격리된 곳이다. 굴뚝이 높은 것은 인간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아져 있다는 증거다. 인간이 쌓아올린 바벨탑이 인간 존재의 자만을 상징하듯이, 굴뚝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상징한다. 촉각을 망실한 나비떼들이지만, 그들이 하늘에서 향연을 펼치면 도시는 격리된 공간에서 그들만의 유희를 즐긴다. 나비와 같은 연약한 존재가 인간의 실존이라면, 그 나비가 살았던 파란 하늘은 격리된 도시의 이미지와는 다른 공간이다. 도시는 신의 분노를 희롱하던 피뢰침이 있는 굴뚝과 같이 인간의 생명이 상품으로 취급당하는 공간이다. 도시는 실존이 망실당하는 곳, 인간의 가치가 떨어진 유배지와 같은 곳이다. 시「굴뚝의
- 이전글경남문학관 상반기 기획전시 <나의 데뷔작> 전시 11.02.25
- 다음글문학평론가 정과리씨 초청 ‘화요일의 문학이야기’ 오늘 오후 7시 경남문학관<경남신문> 10.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