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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작성자 munhak
댓글 0건 조회 1,926회 작성일 2006-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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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바알> 이숙경


  현관문은 비죽이 열려 있었다. 고개가 꺾인 부츠 뒤축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틈 사이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현관바닥에 제멋대로 엉겨있는 신발들을 발로 밀어내고 겨우 안으로 들어서자 발자국이 찍혀있는 마루바닥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푸른 조끼의 사내들과 둘러앉아 무언가를 먹던 상미가 입가를 쓰윽 훔치며 일어섰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상미는 긴 굽의 검은 구두를 신은 채였다.
  “아니. 신발은 벗지 않아도 돼. 그냥 올라와.”


  신발장에 한 손을 얹고 엉거주춤 신을 벗으려던 나는 상미의 흐트러져 있는 머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새삼 주위를 돌아보았다. 짐은 거반 꾸렸는지 거실 구석에 몇 무더기씩 몰려 있고. 거실 한가운데에서 푸른 조끼의 사내들은 저마다 박스를 하나씩 꿰차고 앉아 탕수육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 역시 하나같이 지저분한 운동화나 뭉툭한 랜드로바를 신은 채였다. 빈 박스가 포개져 있는 사이의 결 고운 마루에 구두를 신은 채 올라섰을 때. 유리 한 조각이 박힌 듯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후볐다.


  재작년. 결혼과 함께 이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상미는 종이에 그득히 적힌 모든 목록들을 포기하고 거실에 마루를 깔았다. 열 자 반의 맞춤 붙박이장과 가장자리를 레이스로 박음질한 삼베 커튼. 그리고 수없이 노래를 불러댔던 콘솔까지 단념하면서. 집들이 선물로 맑은 주황색의 샤워크림과 한 무더기의 프리지어 다발을 내밀자. 상미는 무대에서 꽃다발을 받듯 무릎을 살짝 내렸다 폈다. 그리고는 노란 프리지어 다발을 가슴에 안고 마루를 넓게 한 바퀴 돌았다. 짧고 밋밋한 통 원피스에서 황급히 튀어나온 긴 다리는 공중에 떠서 세시 십오 분도 가리키고. 두 시 반도 가리켰다. 그 때 우리는. 커피 분쇄기의 청동 손잡이를 서툴게 돌리고. 작은 서랍에 소르르 내려앉은 커피의 고소한 향을 맡았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마룻바닥에 쿠션 하나씩을 끌어안고 엎드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던 마루의 이음새 찾기.


  상미가 담배 보루 포장지를 허리까지 부욱 찢었다. 네댓 개의 담뱃갑이 바닥에 쏟아지자 주섬주섬 주워 푸른 조끼의 사내들에게 하나씩 건넨다. 신문지와 테이프와 분홍 끈 뭉치가 널려진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나에게도 불쑥 담배 한 갑을 내밀었다.


  “이건 고모 꺼.”


  고모? 나도 반 년쯤 전에는 고모가 될 줄 알았다. 결혼 후 이 년 만의 임신은 모두를 들뜨게 했다. 소식을 알리는 상미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가늘게 떨렸다. 윤주야 이제부터는 널 고모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어. 얼결에 이름을 부르면 아버님이 얼마나 눈총을 주었는데. 고모. 축하해 줘. 그 후로 그녀는 말끝마다 장난스레 ‘고모’를 붙였다. 고모. 놀러와. 고모. 연출가 김이 아직도 잘해 줘? 고모. 갓김치 가지러 와. 아주 맛있게 익었어….


  나는 선 채로 허리를 꺾어 그녀가 켜주는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힘껏 빨았다. 푸르슴한 연기가 눈에서도 나오는 듯 갑자기 눈이 매워진다.


  누군가 박스 하나를 밀고와 만들어준 자리에 앉아 누군가 건네준 소주를 입 속에 털어 넣고. 차가운 탕수육 한 점을 먹었다. 술이 바닥나자. 사내들은 일어나 다시금 짐을 싸기 시작했고. 상미는 부엌 어디선가에서 양주 한 병을 가져왔다. 양주병 허리에 먼지가 살포시 앉아 있었다. 나는 흐물거리는 종이컵을 구겨버리고 새 컵에 양주를 따랐다. 양주 한 모금에 양파 한 조각. 양주 한 모금에 단무지 한 입.


  벽에 기대어 앉아 한 쪽 무릎을 세운 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상미를 쳐다본다. 시린 바람이 한 겹 둘러진 듯한 저러한 모습을 지나간 어느 날.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았던가.


  “윤주야.”


  상미가 자신의 빈 컵을 높이 쳐들었다. 술 때문인지 그녀의 눈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다.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며 나는 박스에서 슬며시 내려앉았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나는 고모가 아닌. 윤주가 되어 여전히 쳐들고 있는 그녀의 빈 컵에 술을 채웠다. 검은 뿔테 안경 속의 상미 눈이 잠시 번득였다. 창백한 이마에 땀이 배었는지 몇 가닥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붙어 있다. 그녀는 언제나 빗살자국이 드러날 정도로 말끔하게 빗어 묶고 다녔다. 염색머리가 흔한 가운데서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은 오히려 눈에 뜨였다. 그 가운데로 드러난 하얀 가르마는 또 얼마나 정갈했던가. 유난히 도드라진 하얀 이마에 마치 늙은 지네처럼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내 손으로 치워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손을 내밀어 머리카락을 치워주는 대신. 목을 확 젖혀 남은 술을 들이켰을 뿐이다.


  푸른 조끼의 사내 하나가 다가와 상미에게 무엇인가 묻는다. 취해서인지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양쪽 귀에 가득 물이 차 있는 것 같이 웅웅거렸다. 상미가 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짐은 오늘 가지고 갈 거지?”


  갑자기 상미의 목소리가 우물에 대고 소리치듯 울리며 들려왔다. 나는 그 우물에 갇힌 여섯 살 된 아이처럼 도리질을 했다. 나는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싫었고. 숨을 쉴 때마다 튀어나오는 양파 냄새가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루에 찍혀있는 발자국이 끔찍하게 싫었다.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아버지 방의 문이 열리고. 푸른 조끼 서넛이 우르르 들어갔다.

아버지는 갑자기 사라졌다. 불과 다섯 달 전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사라졌다.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주말 낚시 중이었다. 잔고기 두 마리가 얕은 물에서 허덕거리는 노란 비닐 통 안에서 지갑이 발견되었다. 오빠는 일본 출장 중이었고. 상미는 임신 초기라 장거리 여행이 불가능했다. 갓 제대한 윤철과 밤을 새워 달려간 해남경찰서에서 아버지의 지갑을 건네받는 내 손이 떨렸다. 이렇게 지갑 하나만 달랑 남기고 아버지는 어디에 가셨단 말인가. 만 원권 지폐 몇 장과 맞은편 비닐 커버에 들어있던 사진. 아버지의 주민등록증 옆에 나란히 꽂혀있던 상미의 사진. 나는 사진 속의 그녀처럼 눈이 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그 스냅 사진은 내가 찍어준 것이었다.


  병원에서 임신을 확인한 상미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발레 시어터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공연에서 그녀는 십오 초 동안 혼자 춤을 추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육만 원짜리 표를 아버지와 오빠에게 주고. 나는 회관 뒤 분수대 앞에 앉아 상미를 기다렸다. 공연장 쪽문에서 나비가 팔랑이듯 그녀가 뛰어 나왔다. 조심해야지. 나는 그녀의 가벼운 날갯짓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이상하게 변해 있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검은색의 눈썹 선이 코 중간까지 짙게 그려진 낯선 그녀의 얼굴에는 붉은색의 볼 터치가 양 뺨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상미는 웃으며 나의 재킷 왼쪽에 노란 리본을 핀으로 찔러주었다. 행사요원. 쪽문 안으로 나를 이끈 그녀는 몇 명의 무전기를 든 사내를 지나쳤다 상미는 내 손을 잡고 작은 복도를 이리저리 돌고 한없이 긴 계단을 내려가 대기실 문을 열었다.


  저마다의 도시락을 먹고 있던 상미와 비슷한 몇 명의 여자들이 인사를 했다. 나는 숨을 고르며 크고 둥그런 조명등이 환히 켜진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 속에서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코를 찡긋했다. 나는 우산을 쓴 일본여인이 그려진 도시락을 풀었다. 상미는 입술 색이 지워질까봐 입을 크게 벌려 초밥을 먹었다. 나는 몰래 들고 온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그녀를 찍었다. 젓가락 끝의 초밥이 반쯤 잘려진 렌즈 속에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대기실에 있는 작은 TV에서 공연모습이 중계되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팔을 죽죽 뻗어 몸을 풀던 상미가 안내방송이 나오자 다시 나를 끌고 복도를 지났다. 상미와 같은 옷을 입은. 혹은 다른 옷을 입은 여자들이 잰걸음으로 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벽 쪽에서 오케스트라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무대 바로 뒤쪽이었다. 모두들 발을 감싸고 있던 털 뭉치 같은 양말을 벗고 작고 가파른 계단 위에 줄을 지어 섰다. 상미는 아직도 따뜻한 보온 양말을 벗어 나를 향해 던졌다. 나는 그녀가 가르쳐 준 구석으로 가서 틈새로 얼굴을 디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대의 조명은 엷게 객석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가끔씩 조명 불빛에 의해 사람들의 얼굴이 정면으로 튀어나왔다가 곧 사라지곤 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눈높이를 낮추어 간혹 비쳐지는 객석의 얼굴들을 더듬었다. 저 객석 어딘가에 아버지와 오빠는 앉아 있겠지. 


  공연이 끝나고 근처의 식당에서 상미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연신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전부 상미 같더라.”
  말쑥하게 정장으로 차려입은 오빠도 웃었다.


  “몇 십 명이 똑같이 머리를 뒤로 묶고. 똑같은 옷을 입고 이리 왔다 저리 왔다 엉기는데 정말 저도 모르겠던데요.”
  두 사람이 한결같이 헷갈리는 것에 바짝 열이 오른 내가 소리쳤다.


  “참 나. 끝에서 두 번째 작품에서 혼자 춤을 추었다니까요.”
  “윤주야. 작품마다 독무는 한두 번씩 꼭 있던걸.”
  오빠가 혀를 찼다.
  “글쎄다. 그런데 얼굴도 똑같더라니까.”


  아버지도 나름대로 열심히 보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분장실에서 찍은 상미의 사진을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 다른 건 몰라도 며느리 얼굴은 구별할 수 있으셔야죠.
  아버지는 다시금 이마를 훔치고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상미가 이렇게 생겼더냐….

  식탁 위에 엎어져 있던 뻐꾸기시계에서 하얀 뻐꾸기가 나와 부리로 식탁유리를 쪼았다. 뻐꾹 따닥. 뻐꾹 따닥.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홉 시였다. 푸른 조끼의 사내들은 서둘러 돌아갔다. 그네들의 어깨에 걸쳐 있는 수건은 보송보송했다. 한 사내가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며 흩어져 있던 신발들을 구멍 뚫린 플라스틱 궤짝 안에 차곡차곡 채워 넣고 갔다.


  아버지 방에서 나온 박스는 세 개였다. 그것들은 현관 앞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 속에는 아마도 내가 알지 못하는. 알 수도 없는 아버지의 삶이 한 자락 깔려 있을 것이다.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 혹은 생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지. 긴 세월 엄마의 병석을 지키면서. 아버지는 두껍게 입은 속내의처럼 쓸쓸함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라운지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아버지께 점심을 사드린 적이 있었다. 엄마가 오랜 병에서 놓여나 드디어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었을 때. 이미 우리에게는 집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이런 곳을 출입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웨이터에게 아버지는 좀 어색하게 말했다. 저. 따뜻한 물을 마시고 싶은데. 아버지는 널찍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사면이 유리창인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오의 햇살이 아낌없이 우리가 앉은 테이블을 비추었다.


  테이블에는 하얀 옥스포드 천 위에 새빨간 같은 질감의 천이 마름모꼴로 겹쳐서 깔려 있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나는 라운지 이름이 인쇄된 냅킨을 가지고 종이 접기를 했다. 아버지는 햇살 때문인지 가늘게 눈을 뜨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참 환하다. 그곳은 확실히 다른 곳보다 환했다.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우유빛 크림수프에 후추를 갈아 뿌리고. 샐러드 옆에 동그랗게 말려 있는 홍당무를 조용히 우물거렸다. 참으로 호사를 하는구나.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조심스럽게 뜨시며 아버지는 또다시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밖으로만 나도는. 아무 쓸모없는 딸이었던 내게 아버지는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다. 오랜 습관으로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두툼한 손을 밥솥에 집어넣어 밥물을 가늠했다. 낡은 한옥 아궁이에 허리를 굽히고 연탄을 갈면서 구멍을 맞추던 아버지.


  상미가 정식으로 우리 집으로 인사를 온 날. 그녀는 오빠와 함께 큰절을 올리면서 언뜻 눈물을 비쳤다. 아버님. 제 손으로 따뜻한 진지 올리고 싶습니다….

  나는 박스에 찍힌 글자들을 읽었다. 새우깡. 새우깡. 죠리퐁. 상미의 짐은 익스프레스 글자가 질서 정연히 찍혀 있는데 내가 가져 가야할 아버지의 짐은 겉에 적혀진 스낵 이름처럼 아주 가벼워 보였다. 정말 그 속에 새우깡이나 죠리퐁이 가득 들어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 한 봉지씩 꺼내어 양파 대신 아삭거릴 것이 아닌가. 나는 반 남짓 남은 양주병을 기울여 다시 컵에 따랐다. 초록색 테이프가 칭칭 감긴 스낵 박스를 쳐다보던 상미가 나를 쳐다보았다.


  “저거… 열어보지 마.”
  나는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가져가서. 구석에 쳐박아 두고 잊어버려.”
  “그럴려구 해.”
  “그냥. 속에는 새우깡이나 뭐 그런 스낵이 있다고 생각해 버려.”
  다시 뻐꾸기가 나와 식탁유리를 쪼았다. 나는 휴대폰을 열고 버튼을 꾹꾹 눌렀다.


  “올라와.”
  어깨를 웅숭크리고 윤철이 들어왔다. 머리가 좀 젖어 있었다. 누구에게랄 것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바닥에 눈길을 주었다. 그 역시 거실을 둘러보기 전에 마룻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먼저 보는 듯했다.


  “어서 와요. 도련님.”
  반 옥타브쯤 올라간 상미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렸다. 무릎을 집고 일어서는 상미의 몸이 잠시 흔들렸다. 여전히 이마에 늙은 지네를 붙인 채. 마치 처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처럼 잠시 두 팔을 허우적거리는가 싶더니 마른 지푸라기처럼 풀썩 엎어졌다. 그녀의 구두 긴 굽에 분홍 타래 끈이 옭매어져 있었다. 그녀의 발목을 잡는 것이 어디 저뿐인가.


  나는 천천히 그것의 매듭을 풀었다. 상미는 등을 돌리고 그대로 누웠다. 그녀의 등에 눌려 있는 빈 단무지 그릇을 빼낼 때. 손끝에 전해졌던 아주 가느다란 떨림.


  윤철은 박스를 하나씩 어깨에 얹고 세 번을 들락거렸다. 끈으로 마무리를 하지 않은 탓에 쉽게 들 수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 박스를 들기 전. 윤철은 나에게 눈짓을 했다. 가야지?


  “먼저 집에 가 있어.”
  나는 십자가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벽 쪽의 식탁 다리 사이에 끼어 마치 그것을 고이고 있는 지렛대처럼 옆으로 누워 있었다.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거무죽죽한 모습으로 --검은 두건을 쓰고 벽에 붙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범죄자처럼. 그렇게 우리의 행태를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제법 굵은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와. 댓돌 위에 앉아 과도로 힘들게 두 동강을 내고 연필을 깎듯 그것을 다듬어 긴 십자가를 만들었다. 일요일 아침이 되면. 간밤의 숙취로 깨지는 듯한 머리를 감싸고 냉장고의 물병을 꺼내는 나의 등 뒤로 아버지는 슬며시 비껴 지나쳤다. 그때 아버지의 손에 들려있던 두꺼운 성경책. 간간이 성경의 뒤에 붙어 있는 중동지방의 지도를 보며 여기저기를 짚어 보는 아버지에게 나는 장난삼아 말했다. 욥바. 다메섹. 갈릴리…. 아버지. 이걸 단장 삼아 이곳들을 한 바퀴 돌아오시죠. 참. 그러려면 조금은 더 길었어야 하는데. 나는 하릴없이 옹색한 대청마루 구석을 지키고 있던 십자가를 짚고 절뚝거리며 걸었다. 아버지의 십자가.


  식탁으로 다가가서 바닥에 뉘어진 십자가를 들어올리는 나를 쳐다보던 윤철은 할 수 없다는 듯. 머리의 빗물을 털고. 다시 박스를 어깨에 얹었다. 여전히 등 돌린 채 누워있는 상미에게 잠시 눈길을 주던 윤철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었다. 뒤이어 들리는 계단을 내려가는 무거운 발소리. 그는 한 쪽 어깨를 짓눌린 채.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낡은 차에서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누워 거실 창 밖을 보고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휴대폰을 열고 시간을 확인했다. 노란 액정판에 숫자가 떴다. 오전 4시 15분.
  여름 차렵이불 하나씩 꺼내어 맨바닥에 깔고 덮고 한숨을 잔 것 같다. 상미가 저만치 이불 하나를 반쯤 덮고 엎드려 있다. 아직도 자는 것일까?


  나는 벽에 기대어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식탁 구석에 박혀 있던 것처럼 희미한 형체로 뭉뚱그려진 채 한 벽의 배경에서 아주 조금 도드라져 있을 뿐이다. 참으로 초라하다. 그것의 삶은 벽에 기대거나 누워 있지 않으면 못에 박혀 공중에 떠 있을 터. 세상에서 아주 조금 튀어난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어떻게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인가.


  “아버님의 십자가였어.”
  상미가 부스스 일어나 앉으며 성냥을 그었다. 탁하고 갈라진 목소리에는 얇은 비닐 막이 덮여 있었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손끝까지 타 들어간 성냥불을 십자가에 가까이 갖다 대었다. 꺼멓게 탄 둥근 황이 목이 부러지듯 툭. 바닥에 떨어지고 이어 불이 떨어졌다. 나는 얼결에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여기 이 모서리.”
  상미는 십자가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작은 불똥 하나가 남긴 흔적으로 화끈한 손바닥에 야윈 나무가 잡혀졌다. 이 나무는. 어느 순간 아버지의 눈에 뜨였을까. 이 나무는 어느 순간 사지가 두 동강나 서로의 허리가 겹쳐진 채 이런 모습으로 서 있게 되었을까. 하나는 짧게. 또 하나는 그보다 조금 길게 잘려져서. 자신이 쉰아홉이 된 늙은 사내의 방에서 예수의 삶을 조용히 얘기해주는 성물(聖物)이 될 것을 어찌 알았을까…. 예수의 피가 뚝뚝 연이어 떨어졌음직한 긴 쪽의 나무 끄트머리가 심하게 패어 있었다.


  “윤혁씨가 이걸로 나를 친 거야.”
  오빠가? 그렇다면 그곳엔 정말 핏자국이 배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오빠는 해남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까칠한 얼굴로 돌아온 오빠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윤철과 거실 마루에서 기진맥진해 누워있던 나는 일어설 힘도 없었다. 아무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포기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자석에 끌리듯 오빠를 따라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쪽 장 하나. 서랍장 하나.
  상미가 혼수로 해온 보료 위에 시원한 삼베요가 정갈하게 깔려 있었다. 삼 단짜리 작은 책장. 그리고 그 옆의 작은 공간에 못 박혀 있는 나무 십자가.


  온 식구가 모인 가운데 오빠가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쯤 남은 박하사탕 봉지. 작은 수첩. 아버지가 홀로 다녔을 극장 표. 고궁 입장권. 차곡차곡 쌓여있는 낡은 앨범….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서너 묶음의 편지 뭉치.


  맨 밑의 서랍바닥에서 두꺼운 노트를 발견한 오빠는 후드득 그것을 펼쳤다. 相美에게.


  첫 장 맨 위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유난히 획이 긴 아버지의 글씨. 덩그마니 이름만 적어놓은 밑으로 하얗게 비어있는 공백. 다음 장도 마찬가지였다. 相美에게. 마침 얼음물을 들고 문을 들어서던 상미가 새파랗게 질려 뒷걸음을 쳤다. 잠이 덜 깬 윤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나는 목구멍 밑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비명을 참느라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오빠는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천천히 넘겼다. 相美에게. 相美에게. 相美에게….

  상미는 유산했다. 그러나 내가 정신없이 달려갔던 병원은 애초에 그녀가 정기적으로 다니던 산부인과가 아니었다. 수술실에서 입원실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덜덜 떨고 있었다. 토인의 그것처럼 부풀어 있던 시퍼런 입술. 입술 색보다 더 진한 퍼런 멍이 가득한 얼굴. 붕대가 터번 같이 둘려있는 머리. 나를 보자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꿈이지? 지금 나. 꿈을 꾸고 있는 거지?


  퇴원한 그녀를 뉘어놓고. 서툰 솜씨로 미역국을 끓이던 나는 부엌 창문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불길한 그림자를 보았다. 후텁지근하고 음습한 대기 속에서 주차된 차 보닛에 피어오르는 열기의 아지랑이. 32도의 온도는 지상의 형태를 굴절시킨다. 마주 보이는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 창틀이 구불구불 휘어져 있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예각처럼 굽어진 상미의 인생처럼 말이다.


  오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버지처럼 사라졌다. 상미가 퇴원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중국. 하긴 그 당시에는 오빠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아무도 몰랐다. 오빠의 행방은 그 며칠 후에 회사에서 알려주었고. 다시 며칠인가 지난 후에는 신문에서도 확인을 해주긴 했다. 사회면 밑단에 몇 줄로 드러난 오빠의 행적. 고객 돈 빼돌린 투신사 대리. 중국으로 잠적.


  상미가 십자가 위로 후욱. 연기를 내뿜었다.
  “언젠가 꿈을 꾸었어.”


  상미가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말을 끊은 사이. 그녀의 앙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어 뺨으로 어깨로 그리고 온 몸으로 떨림이 번져 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머리 주위에 마치 달무리 같은 희미한 빛이 둘러 있었다. 저것이 무엇일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대신 나는 떨고 있는 상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마치 한 움큼의 칵테일 얼음조각을 쥔 것 같이 쩍쩍 달라붙는 냉기.


  “나는 춤을 추고 있었어. 이 자리에서. 저 끝까지 마치 무대의 조명처럼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지. 몸이 굉장히 가볍게 느껴졌어. 지붕이 없다면 하늘까지 날아 갈 것 같았지. 입고 있던 꽃무늬 홈웨어에서 꽃들이 전부 튀어나와 공중에 둥둥 떠 다녔어. 데이지. 마가렛. 리시안샤스 같은 꽃들이 이 거실 안에 가득 찼어. 향기가 굉장했지. 그 때. 나는 무슨 춤을 추었을까. 아주 익숙한 흐름으로 봐서는 예전에 추었던 어떤 대목이었는지 모르지. 격렬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게 오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 머릿속에서 흐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어. 얼마나 춤을 추었을까. 온 몸이 땀에 흥건히 젖어 나는 바닥에 쓰러졌지. 마루에 뺨을 대고 허공에서 꽃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보았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 때. 가슴이 터질 것 같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에게 누군가 다가왔어. 아주 조용히 다가온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그는 어디에서 왔을까. 하늘에서? 창문으로? 아니면 꽃들 속에 숨어 있던 정령 중의 하나는 아니었을까. 그가 땀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핥기 시작했어. 젖은 머리카락도. 가슴과 겨드랑이까지 그리고 땀으로 미끈거리는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눈을 감고 생각했어. 좀 쉬었다가 같이 춤을 추어야지. 그 다음엔 내가 이 사람의 땀을 핥아주어야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런데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어. 아마. 가위에 눌렸었나봐. 꿈에서 깨어나 보니 내가 마룻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었어. 이렇게.”


  상미는 한 컷씩 잘려진 슬라이드 필름처럼 조금씩 몸을 뒤로 꺾어 누웠다. 어느새인가 그녀의 머리근처를 맴돌던 뿌연 빛이 사라졌다. 조용히 울고 있는 상미 옆에 나도 쓰러지듯 바닥에 몸을 누인다. 연꽃 모양의 전등과 같이 달려있는 실링 팬 날개 사이로 작은 야광별이 보였다. 조금 큰 별 두 개와 작은 별 하나. 잠을 자다가 눈을 뜨면 별이 보였으면….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는 상미를 위해 오빠가 식탁의자 위에 올라서서 팔을 길게 뻗어 붙여 주었을 것이다.
침실 천장에 가득 붙여놓은 별. 그 별 중 얼마가 흘러나와 거실 천장까지 왔노라고 상미는 저 별을 가리키며 함박웃음을 터뜨렸었다. 그렇게 웃는 그녀를 폭행한 오빠가 바로 저 별을 하나하나 붙여주던 그 오빠인가? 어디서부터일까. 이런 긴 진흙탕 길의 시작은.


  지나간 반 년의 세월이 이제껏 내가 살아온 서른 해보다도 길게 생각되었다. 나는 갑자기 늙어 버린 것처럼 온 몸에 힘이 빠진 채. 거리를 쏘다녔다. 작정하고 달려들었던 뒤늦은 논문도 팽개치고. 열 번 이상을 모텔에서 뒹굴고. 적어도 서른 번 이상의 아침을 그의 옹색한 원룸에서 맞이하던 연출가 김이. 나를 별 이유 없이 슬슬 피해 다니기 시작해도 전혀 신경이 써지지 않았다.


  “오빠는 그 돈을 어디에 썼을까?”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꿈속의 장면처럼 누워있는 상미를 돌아다보며 나는 엉뚱한 말을 던졌다. 갑자기 엄청난 횡령액수의 행방이 궁금해졌으므로. 이제껏 내가 알던 오빠는 전철에서 매일 만나는 걸인에게도 동전이 없어 주지 못하면 미안해하는 사람이었다. 이 아파트를 사기 위하여 회사에서 융자를 얻었을 때 오빠는 조금이라도 융자금을 덜 얻기 위해 자신의 차를 팔아버렸고. 어린 신부는 착하게도 자신의 적은 개런티를 모두 생활비에 집어넣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어느 때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도 되고. 또 어느 때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꽃게 찌개도 되었을 터.


  오빠가 며칠 동안 회사에서 틀어박혀 이제껏 세상을 살던 성실한 지식으로 고객의 돈을 빼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집에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둔 채. 훌쩍 비행기를 타고 구름 밑의 세상을 내려다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돈?”
  상미는 아주 조금씩 밝아오는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색 크레용으로 그린 것 같은 바깥 풍경 속에서 삑삑하며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있으면 다시 푸른 조끼의 사내들이 들이닥칠 것이고. 그녀는 떠날 것이다. 뒤에 실린 짐들처럼 조용히 운전석 옆에 앉아 밝아오는 서울을 떠날 것이다. 그녀는 될 수 있으면 서울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그 돈. 오빤 별로 소용이 없었을 텐데.”
  상미는 나를 돌아보았다.
  “윤혁씨는 자신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 올까봐 겁이 났을 거야.”


  그래서 이 집까지 아예 없애 버렸다는 건가? 집은 얼마 전 차압이 들어왔다. 집값의 열 배가 넘는 돈을 가지고 간 오빠는 지금쯤은 중국에서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써야할는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어서서 싱크대로 다가가 렌지 후드에 불을 켰다. 샛노란 불빛이 삼각형으로 부엌을 비추었다. 그 불빛의 얼마쯤은 식탁 모서리에 굴절되어 상미의 등덜미까지 다가간다. 무언가 마실 것을 찾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싱크대의 물을 틀고 입을 갖다 대었다. 꿀꺽. 하고 넘기는 뒷맛에 소독내가 엷게 남는다. 플라스틱 궤짝에 그릇들이 하나하나 다소곳이 엎드려 있다. 다시는 그것들이 화악 펼쳐진 꽃잎처럼 식탁 위에 놓여져 따뜻한 식사를 만들어 줄 수 없을 것이다. 개수대 위에 설치되어 있는 라디오 버튼을 누른다. 아주 작게 틀어진 FM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이른 새벽. 상미는 쌀을 씻거나. 감자를 깎으며 음악을 들었겠지. 언제나 일찍 일어나는 아버지는 벌써부터 거실에 앉아 신문을 펼치고 있었을 것이다. 테이프로 문을 막아 논 냉장고에 노란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들이대고 희미한 어둠 속에서 글자들을 하나하나 읽었다. 내일 아침의 메뉴. (밑줄 두 개 긋고) 시금치 된장국. 어리굴젓. 계란찜. 김치 겉절이. 김…. 내일 아침의 메뉴에서 그 ‘내일’은 언제였을까.


  대학 때부터 연출을 공부한답시고 자유와 방종의 중간쯤을 풍미하던 나의 청춘에 비하면 상미의 청춘에는 연습실과 공연장을 오가며 땀을 흘리는 춤밖에 없었다. 두 번째 남자와 헤어지고. 그녀를 불러냈다. 어둡고 냄새 나는 지하 술집에 앉혀놓고 눈물을 안주 삼아 테이블에 즐비하게 맥주병을 늘어놓고 주정하는 나를. 단정히 앉아서 바라보았다. 계속 같은 얘기를 되풀이하는 나의 신파조 넋두리를 한마디도 중간을 자르지 않고 들었다. 그리고? 자꾸만 공중을 휘젓는 나의 발을 택시 안에 밀어 넣고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낡은 한옥 대문 앞에서 그녀는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초인종을 눌렀다. 허리가 반쯤 꺾인 나를 억지로 세워놓고. 문을 열어주는 아버지의 심각한 얼굴 표정이 점점 누그러져 종내 소리 없는 미소로 바뀌게 될 때까지 열심히 변명을 하던 그녀의 모습.

  밖에서 부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삿짐 트럭이 도착했다. 밤새 가는 비가 왔는지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비가 오는지 모르겠다. 푸른 조끼의 사내들이 차 문을 열고 훌쩍 뛰어내려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 저마다 빨간 페인트가 칠해진 장갑을 꼈고. 그 중 한 사람은 허리에 잔뜩 연장을 달고 있었다.


  상미가 부석부석한 얼굴을 한 번 부비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싸아 하니 안으로 흘러든다. 두런거리는 목소리와 묵직한 발소리가 뒤섞여 들리면서 사내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어깨에 빗방울이 몇 개씩 떨어져 있다.


  검은 색의 긴 코트를 걸친 상미가 다가와 어깨에 숄을 감아 주었다. 그녀의 검은 숄이다. 이 숄을 걸치고. 그녀는 오빠를 마중 나갔을 것이다. 가끔 동네 어귀의 생맥주 집에 들러 오빠와 마주 앉아 팝콘을 아삭거릴 때 이 숄을 걸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숄은 끈질긴 인연처럼 나의 몸을 한 바퀴 돌고도 남아 팔에 늘어져 있다.


  아주 짧은 시간에 푸른 조끼의 사내들은 짐을 다 옮겼다. 상미가 배달되었던 그릇에 신문지를 덮고 현관밖에 내놓는다. 한 사내가 마지막으로 올라와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바닥에 흩어져 있는 모든 것을 쓸어 담았다. 신문지. 빈 병들. 우그러진 컵. 아직 술이 남아 있는 양주병을 보고 사내는 상미를 쳐다보았다. 가져가세요. 그것은 사내의 앞자락으로 들어가 불룩한 가슴을 만들었다. 사내는 십자가를 집으려다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 십자가를 집어 쓰레기봉투 속에 집어넣었다.


  밖에는 아주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몇 사람의 양복을 입은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 간다. 이삿짐 트럭 옆의 차에는 한 남자가 시동을 걸고 있고. 그 운전석 앞에서 얇은 면바지에 맨발 차림의 여자가 서 있다. 뒤로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머리 밑의 목덜미가 상큼하다. 여자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가 알 수 없는 말을 옹알거린다. 여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남자는 지갑을 꺼내어 몇 장의 지폐를 아이 손에 쥐어준다. 이야호. 여자 입에서 아주 맑은 새소리가 난다. 이야호. 아이의 입에서도 그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운전석 옆자리의 문을 열고 한 발을 올려놓으려던 상미가 한참이나 그 모습을 쳐다보았고. 나는 그렇게 정신없이 쳐다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오빠도 떠나가 버렸고. 이제는 상미도 어디론가 가려 한다. 나의 눈길을 느꼈는지 그녀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갑자기 오스스 한기가 돌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를 그녀에게 맡겼다. 상미는 무릎 아래까지 흘러 내려가 있던 숄을 다시 걸쳐 주었다. 토닥토닥. 그녀가 나의 어깨에 숄을 눌러준다. 흘러내리지 마라. 토닥토닥. 흘러내리면 안 돼. 나는 다시 차에 오르는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래. 대체 어디로 간다는 거야?”
  상미는 아무 말 없이 운전기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부릉거렸다. 운전기사의 장갑을 낀 손이 기어를 움켜잡았다. 차가 움직이려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상미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이 입술을 움직였다.


  “뭐라고? 안 들려.”
  상미가 드르륵 차창유리를 내렸다. 갑자기 하느작거리던 빗줄기가 거세어지며 나의 뺨을 때렸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빗줄기에 나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나는 서서히 움직이는 차를 따라 뛰며 소리쳤다.


  차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운전석 맞은편의 백미러에 상미의 얼굴이 비쳤다. 그녀의 입이 다시 자그맣게 움직인다. 나는 상미의 입 모양을 그대로 되뇌어 보았다. 해남. (끝)


  바알이란=Baal. 바알 神.(고대 셈족의 神). 태양신.(페니키아 사람의). 邪神. 우상.


▲1958년 서울 출생 한국방송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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