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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탄생100주년기념사업 논란에 대한
작성자 경남문학관
댓글 0건 조회 1,774회 작성일 201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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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탄생100주년기념사업 논란에 대한

기념사업회의 입장


올해는 ‘고향의 봄’이라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문화자산을 활용하여 공업도시 창원시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그 창작 배경지로서 가질 수 있는 문화적 가치를 시민들의 자긍심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고향의 봄 기념사업을 시작한지 만 10년이 되는 해이다. 더구나 우리지역이 배출한 아동문학가로서 한민족의 노래인 ‘고향의 봄’을 지은 이원수 선생이 돌아가신지 30년, 태어나신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런 뜻 깊은 해를 맞아 추진하고 있는 기념사업이 새삼스레 친일 논란과 우상화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러한 논쟁에 대해 사업반대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일부 시민단체에 대해 폄훼하거나 공격하여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그들 단체가 지향하고 있는 사회정의구현에 대해서도 시비할 의사가 없다. 다만 고향의봄기념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단체의 입장에서 시민들과 시민들의 대의기관인 시의회, 그리고 창원시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간의 진행상황에 대해 기념사업회측의 입장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우리는 이원수 선생이 과대 포장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이원수 선생을 창원시의 대표브랜드로 만드는 게 아니라 민족노래인 ‘고향의 봄’을 브랜드화 하는 사업들을 추진해 왔다. 이를 위해 이원수 선생의 공과에 대해 한 치의 가감 없이 드러내려 하였고, 우리의 어린이들이 올바른 역사관, 올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하는데 과거 10년 동안 최선을 다해왔다. 그래서 단체의 명칭도 이원수기념사업회가 아닌 고향의봄기념사업회이다. 이를 두고 ‘친일논란이 있으니까 기념사업추진과정에서 바꾼 것이 아니냐’ 하기도 하는데 친일작품이 발견되기 훨씬 이전인 2001년 처음부터 고향의봄기념사업회로 출발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선생의 친일작품에 관해서도 이원수 문학관 개관과 더불어 전시관과 각종 인쇄자료에도 분명하게 밝혀 공과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단 한 차례의 잘못도 용서될 수 없다는 극단적 역사논리보다는, 한때 잘못된 판단으로 실수 저지를 수 있지만 그 뒤 치열하고 진지하게 뉘우치고 새롭고 올바른 삶을 통해 평생 사회와 국가에 더 큰 이바지했다면 그 삶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게 현실적이고 올바른 교육이 아닌가 한다.

2. 이원수는 여느 친일인사들과는 달리 평가돼야 한다.


한 인물에 대해 기념사업을 반대하는 근거가 친일작품을 썼고,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인가 하는 본질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이원수 선생은 일제 말기 친일작품을 발표했고,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소개하는 친일파의 규정을 보면, ‘일제공직자라 하더라도 생존상 불가피하여 협력한 경우, 또 공직자로 생존상 불가피한 이상 친일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그 잘못을 깨치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할 경우 친일 매국노로 규정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있다.

이원수 선생의 경우 ‘생전에 떳떳하게 밝히진 못했다 하더라도 이후 살았던 태도로 미루어 일제 말기 한때 저질렀던 친일행적에 대해 뼈아프게 뉘우쳤음이 분명하다’아동문학가 고 이오덕 선생은 밝혔고(2002년 11월 세미나자료), 해방 이후 철저하게 독재정권을 비판하며 약한 이들, 어린이들을 위해 모진 세월을 견뎌왔음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더구나 2009년 11월 대한민국의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말기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는 이원수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물론 국가기관과 민간연구소의 친일기준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 이원수와 다른 친일인사들과 다른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친일행적과 친일 매국노나 민족 반역자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그 구별기준은 상해 임시정부와 반민특위에서 규정한 것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그 분의 삶을 살펴볼 때 새로 밝혀지는 친일행적 몇 가지로 친일매국노라고 볼 수 없고, 오히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억압이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왜곡시킬 수 있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이주영(교사, 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이사장)/경남도민일보 2002년 3월 6일자


이원수 선생이 남긴 글을 서로 견주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시는 우리지역, 우리나라에서는 이 따위 일들로 여러 사람을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이것도 우리 겨레의 아픔이라면 말이다.

- 한중권(어린이신문 굴렁쇠 경남지사장) / 경남도민일보 2002년 3월 5일자


친일인명사전은 인기투표하는 사전이 아니다. 이름을 깎아내리거나 땅 속에 파묻어버리자는 사전도 아니다. 우리가 참답고 아름다이 살자고 하는 사전이다. 한 점 티끌이 없을 줄 알았던 사람한테서도 티끌이 있었음을 느끼고 실망하거나 내동댕이치자는 친일인명사전인가? 한 점 티끌을 감싸면서 이와 같은 슬픔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가슴에 새기고 되뇌이자고 하는 친일인명사전인가? 

-최종규 기자/ 오마이뉴스 2008. 5. 1자.


3. 지난 10년간 특별한 논란 없이 추진되어온 기념사업에 대해 원점에서 재논의하는 것이 적절한가?


창원에서는 이미 10년 전인 2001년 초에 민족의 노래‘고향의 봄’의 창작 배경이 창원임을 널리 알려 시민 공동의 가치를 살리고 지역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고향의봄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고, 그동안 고향의봄창작기념행사, 학술행사, 고향의봄문학기행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해 왔다. 그 외에도 창원예총을 중심으로 매년 고향의봄예술제를 개최해 올해로 25년이 되며, 창원 시민의 날을 기념하는 대표적 봄축제로서 고향의봄축제는 지난 20년간 진행되어왔다.

이원수문학관 개관을 준비하던 2002년 친일시 발견으로 논란이 시작되긴 했지만 기념사업회 자체 토론회와 여타 단체의 토론회 등 3~4차례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친일논란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거쳐 왔다. 친일시 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거쳐 특별한 반대 여론 없어 이원수문학관을 개관했으며 기념사업회는 이원수의 문학적 업적과 함께 친일관련사항을 사실에 입각해 친일행적자료를 공개 전시 하는 등 역사적 사실을 일깨우려 했다.

기념사업을 추진해오는 과정에서 단 한차례라도 시민들의 반대여론, 시민단체의 반발이 있었다면 사업방향이 바뀌든지 중단하든지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던 점을 통해 이원수가 비록 일제 말기에 친일문학작품을 썼지만 그 이전과 해방 이후의 반성적인 여러 행적을 통해 국가적 사회적 기여한 공이 커 공과 과를 동시에 다루는 기념사업에 대해서는 허용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원수 선생 모든 것 본다.

2일 고향의봄도서관 개관기념전시회

8일 동원홀서 민족정신 혼불 세미나도

/경남신문 2002년 11월 1일자


친일시까지도 보존 “더 큰 교훈될 것”

고향의봄도서관 개관 기념 이원수 문학세미나

/경남도민일보 2002년 11월 11일자


한때 친일 뼈저리게 반성, 평생 올곧은 삶으로 속죄

/경남일보 2002년 11월 6일자


25일, 창원서 ‘고향의봄’창작 80주년기념음악회

‘고향의봄’창작 80주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여 이원수 선생의 시에 붙인 창작합창곡집을 발간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창원의 노래, 겨레의 노래’라는 주제로 공연을 연다.

/경남도민일보 2006년 11월 23일자.


중요한 것은 이런 사실 앞에서도 그들을 기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록 그들이 36년이란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면서 말기의 극악무도함에 굴해 다소의 친일 전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모국어로 쓴 문학마저 외면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공감한 것이다.  

/경남신문 2007년 5월 2일자 칼럼 중에서 


이원수문학상 제정하자

고향의봄창작84주년기념행사 ‘노래하자, 창원의 봄’성료

‘탄생 100주년 준비 토론회’서 영문번역 작업 등 사업제안

/경남신문 2010년 4월 6일자


이처럼 친일작품이 발표된 이후 치열한 토론을 거쳐 기념사업을 해 왔기 때문에 새삼 처음 친일행적이 발견된 것처럼 원점에서 재논의, 재평가 해 보자는 논지에 대해 부적절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한 작가의 생애와 업적 등의 공과는 평생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필요한 데 친일 행위 하나만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논의의 장이 펼쳐진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더구나 그 논쟁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10년간 진행해온 기념사업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고, 이는 지금까지 기념사업에 동의하고 많은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창원시민 전체를 기만하고, 시민들의 대의기구인 창원시의회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다.


4. 지역사회의 합의 논란에 대해


한 언론에서 언급된 내용과는 달리 이원수 선생의 친일문제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 단지 다양한 기념사업과 토론회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위해 노력해왔다. 2002년 친일작품이 발표된 이후로 이원수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면서도 언제나 이원수 선생의 친일작품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 왔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비단 기념사업회 뿐만 아니라 지역문단과 아동문학 관련 단체에서도 다양하게 이루어져왔다. 지역주민들 또한 자발적으로 이원수 선생에 대해 알기 위해 ‘한마을한책읽기운동’을 펼치며 이원수 선생의 대표작품을 읽고, 성장지와 <고향의 봄>의 배경지를 둘러보는가 하면, 지역의 청년회에서는 <고향의봄>배경지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정례적으로 청소에 나서는 등 소중한 문화자산으로 여겨오고 있다. 이 외에 어떤 방법으로 무슨 절차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내야 하는지에 대해 역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창원시와 의회의 동의, 심의를 거치는 정당한 방법에 따라 기념사업을 추진해왔다. 대의민주주의사회에서 합의는 정치권에 위임되어 있고 민의를 반영 못할 경우 선거로 심판하지 않는가.


2002년 11월 8일 / 창원 - 영원한 고향의봄 /주최 : 고향의봄기념사업회

2002년 11월 23일 / 경남작고문인 문학심포지엄/ 주최 : 경남문학관

2006년 2월∼12월 / 한마을한책읽기운동 - 5월의 노래/의창사회교육센터

2007년 2월∼12월 / 한마을한책읽기운동 - 숲속나라/의창사회교육센터

2008년 가을 / 이원수, 이오덕, 권정생이 남긴 숙제 대담 수록 / 창비어린이

2008년 8월 22일 / 이원수 이오덕 동시의 현실수용양상 / 푸른 아동문학회

2009년 12월 5일 /창원이 낳은 한국대표예술가 학술세미나/고향의봄기념사업회, 창원남산상봉제

2010년 4월 2일 / 이원수탄생100주년준비를위한토론회/고향의봄기념사업회

2011년 창비어린이 봄호 / 탄생100주년 다시 보는 시인 윤석중과 이원수 / 창비어린이

                          

5.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에 관해.


이원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내 문학관련 사업 가운데 가장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산문화재단(교보생명의 사회공헌사업)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올해의 인물로 이원수 선생 을 선정하여 학술세미나 및 문학그림전 같은 ‘탄생100주년문학인 기념문학제’를 준비하는가 하면 한국아동문학인협회 등 전국적으로 여러 단체에서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선생의 고향이자 문학관이 있는 창원에서 선생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을 펼친다면 전국적으로 문화도시 창원을 알리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에서 추진해 왔다.

물론 흉상 제작이 개인을 우상화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흉상은 전국의 여타 문학관에서 공통적으로 비치하고 있는 필수 조형물이다. 이원수문학관은 다른 문학관과는 달리 도내는 물론 전국에서 연간 수천여명의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다녀가고 있기 때문에 관람객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원수 문학상은 한국아동문학의 저변확대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의미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향의봄도서관 개관했던 2002년 세미나부터 작년 4월 100주년 기념사업준비를 위한 토론회까지 여러 차례 제안된 사항을 적극 반영한 사업으로 본질적으로는 건강한 동심, 어린이 사랑의 정신을 회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아동문학인을 양성, 격려하자는 데 목적을 두고 준비 중이다. 지난해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를 위한 토론회에서 상의 이름에 대한 이견은 있었지만 문학상의 제정에 대한 반대 목소리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또 이원수문학상은  내부적으로 사업의 목적달성을 두고 명칭문제를 포함한 시상내용 등에 대해 최종 확정을 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 외 전체 예산의 대부분은 우리지역의 어린이들을 위한 잔치프로그램과 시민들과의 공감대, 혹은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토론회를 위한 것이어서 한 인물을 우상화하는 여타의 기념사업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암울했던 시대를 살면서 우리 민족에게 ‘고향’의 포근한 정서를 심어준 이원수, 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기념사업은 친일행적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 또한 드러내고 공과 과를 평가하는 또 하나의 시험대인 셈이다.


6. 박완수 시장의 축사 내용에 관해


이원수탄생100주년기념사업선포식 시장 축사 가운데 이원수 선생의 통합창원시 대표브랜드화 발언은 사전에 계획되고 의도된 발언이라기보다 행사 관계자들과 참석자들에 대한 의례적인 격려성 발언이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의 업적에 비해 과대 포장되거나 억지 미화하려는 데 대해서는 창원시와 기념사업회에서 함께 경계해 왔으며, 순수하게 전 세계 모든 한민족이 즐겨 부르는 ‘고향의 봄’이라는 글로벌 콘텐츠를 활용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7. 이원수는 어떤 사람인가


양산에서 태어나 1년도 안 돼 창원으로 이사,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마산으로 옮겨 마산공립보통학교· 마산공립상업학교를 다녔다. 마산공립보통학교시절 조선인을 학대하는 일본인을 보고 이를 비난하는 글을 학교신문에 실었다가 담임선생님이 징계를 받는 일도 있었고, 1930년 함안금융조합에서 근무하다가, 1935년 2월 '문학방면에 서적을 회람 연구'(일명 함안독서회사건) 하다가 일제에 저항하려 했다 하여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잡혀가 4월 말 구속, 10개월 간 징역을 살기도 하였다. 1931년∼1945년 함안금융조합 서기(월31원)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1926년 방정환(方定煥)이 주재하는 {어린이}에 동요 [고향의 봄]을 발표하여 등단, 윤석중(尹石重) 등과 {기쁨사}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1945년 경기공업학교 교사, 47년 박문출판사 편집장을 지내고, 54년 한국아동문학회 창립에 참가, 부회장이 되었으며 서울특별시문화위원회 문화분과위원, 한국문인협회 창립회장 등을 지냈다. 73년 한국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80년 대한민국문학상 아동문학부문 본상 등을 받았다.


8. 이원수의 친일, 과연 적극적인 친일이었을까? 기회주의자였을까?


이원수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이듬해 1911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일본의 세상에서 생의 절반을 보냈다. 물론 1942년과 1943년 친일작품을 발표했다. 분명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만약 이원수가 적극적인 친일인사였다면 다른 친인문인들처럼 그 이전부터 친일작품을 써야 했을 것이다. 일제 수탈기간에 함안금융조합에서 일한 것이 친일일까? 이원수는 딸만 여섯 명이었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창원 소답동에 살던 어린 시절에는 한 동네에서도 여러 번 이사를 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이었고, 아버지마저 마산으로 이사 간 뒤 얼아 안 돼 돌아가시고 만다. 어린 이원수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이원수의 누이는 권번의 기생이 되기도 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이원수가 함안금융조합에 일한 것에 대해 과연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그 시절에 대해 이원수는 털어놓고 하는 말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런데 이듬해인 일천구백삼십칠 년에 나는 함안 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되었다. …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어 세상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그런 시대였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우리에게 과연 무슨 잣대가 올바른 평가를 내리게 할까. 이원수가 과연 기회주의자였다면 해방 이후 권력과 결탁하여 돌아가기 전까지 부와 권력을 누리려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원수는 해방이후 철저히 자기반성의 삶을 살며 언제나 약한 자의 편에 서 있었다. 이승만이 자신의 전기문을 써달라고 하였지만 거절하였으며, 박정희 정권 때는 육영재단에서 발행하던 잡지 『어깨동무』의 편집장이 되어줄 것을 제안했지만 끝내 거절을 하였다. 자녀들 월사금을 대기 힘들어 밤을 새워가며 전집 번역을 해야 했지만 독재 권력과는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만화영화에서조차 반공이데올로기를 강요하던 시대에도 언제나 통일과 이산가족문제를 다루었으며, 양민학살사건이나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도 동화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왔다. 이원수 선생의 해방 이후 삶에 단 한 차례라도 반사회, 반민주, 반민족적 행적이 있었다면 기념사업을 고려했을 것이다.




8. 고향의봄기념사업내용과 성과


(사)고향의봄기념사업회는 2001년 고향의봄기념사업추진위원회로 출발하여 고향의봄도서관과 이원수문학관 개관을 위해 유품과 자료 확보 등 실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2008년 사단법인화한 뒤 이원수문학관을 위탁운영하고 있다.

2003년 이원수문학관 개관 이후 학술세미나를 비롯, 창원예총과 더불어 고향의봄축제를 주도하며 고향의봄창작기념공연, 고향의봄문학기행, 이원수독서교실, 동원문학교실 등을 열어 민족의 노래‘고향의 봄’의 정서적 공간이 창원임을 공감하고, 지역민들에게는 자긍심을 고취하는 등 창원의 문화도시로의 이미지를 높여오고 있다.

특히 2008년부터 시작된 고향의봄문학기행에는 전국의 많은 아동문학인, 학생과 학부모, 아동문학 연구자들이 참여해 지금까지 2천명이 넘는 타지의 단체 관람객들이 이원수문학관과 고향의 봄의 배경지인 창원을 둘러보고 다녀갔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런가 하면 KBS를 비롯한 주요 언론사에서 매년 봄이면 다양한 형식으로 ‘고향의봄의 도시- 창원’이 전국에 소개되고 있고, 기념사업회는 전국의 아동문학단체들과 연계해 창원이 아동문학의 메카로 자리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다양한 공연과 자료 발간을 통해 동심의 도시, 고향의 따뜻한 정서를 품고있는 도시로서의 이미지를 높여 창원시민들에게 자부심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해에는“2010년도 문화예술 우수단체”에 선정되어 표창을 받은 바 도 있다.


※별첨 : 행사관련 신문보도자료

       (이원수 문학관 홈페이지 www.leewonsu.co.kr 자료 참고)



2011. 3. 3


이원수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 

(사)고향의봄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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