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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끌리게 하는 시인 -정남식
작성자 630128
댓글 0건 조회 4,484회 작성일 200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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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 <16> 나를 끌리게 한 두 시인 정남식·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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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시집 두 권을 책상에 나란히 놓고 고민 중이다. 정남식의 ‘철갑 고래 뱃속에서’(문학과지성사)와 젊은 시인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이다. 이것들은 최근 나의 시적 무심함(내지는 무능)에 비하면 이례적일 정도로 빠르게 통독한 시집들이다.

각각 저 나름의 리듬과 색깔과 정조가 변별력 강하게 깔려 있지만, 내게는 이 두 시집이 근래 보기 드문 ‘짝패’로 여겨진다. 그러나 세밀한 접점들을 찾아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꿰어내려 하면 도통 갈피가 안 잡히는 저마다의 요설들로 제각각 공명할 뿐이다.

그래도 난 이 두 시집을 연결시키려 애쓴다. 이건 정작 시를 쓴 당사자들과 무관할 뿐더러, 각기 시들이 쓰여지고 읽히는 고유한 방식과도 상관없다. 나는 아마도 두 시집을 빌미로 내 속에 응어리진 요설들을 풀어 놓고 싶은 모양이다.

정남식은 1990년 첫 시집 ‘시집’(문학과지성사)을 낸 이후 15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서문에서부터 뒤 표지 글까지 말 그대로 한 채의 ‘시의 집’을 건축적으로 구성했던 첫 시집은 황지우 박남철의 계보를 잇는 극단적 해체시의 한 예를 보여줬었다.

그러나 그 이후 정남식은 그 저돌적인 실험성 만큼이나 급작스런 속도로 한국 시단에서 종적을 감춰버렸다. 내가 ‘시집’ 이후 정남식의 시를 본 것은, 어느 사화집에 실렸던 (이번 시집에도 실린) ‘경동시장’ 한편뿐이다.

십자말 퀴즈가 실린 그 긴 시를 봤을 때 문득 당혹스러웠지만, 충격까지는 아니었다. 되레 초창기의 파괴성이 별 뜻 없는 말장난으로 변질됐다는 느낌이 강했다. 막말로 ‘힘이 딸린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완전히 그를 잊었다.

정남식 또래로 비슷한 시적 파괴성을 드러냈던 이로는 함성호 함민복 등이 있다. 하지만 최근의 그들은 시적 해체에 몰두하기보다는 여전한 불화와 불온의 근저에서 한시적이거나 전략적으로 재구성되는 또 다른 현실의 지평을 모색한다. 그러면서 각각의 시적 영토에서 나름의 안정성을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걸 시적 성숙이나 발전이라 부르는 데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사십대의 술살 속에 여전히 아이의 정신을 간직한 ‘배 나온 소년’들이다. 소년이란 자기가 만든 장난감을 곧 바로 부수고 다른 걸 만드는 데 골몰하는 골치 아픈 인간 유형을 뜻한다.

따라서 그들은 장기적으로 변화를 지향하되, 단기적으로 영속하는 현실의 지층에 만족할 줄도 안다. 그 만족이 곧 싫증이 되고 환멸이 되고 염증이 되어 다른 지평을 꿈꾸게 만든다. 그러니 그들은 발전하기 전에 스스로 파괴된다. 그 파괴가 그들 창작의 밑거름이다.

그러나 삶 자체는 그대로 존속된다. 이즈음 시인들이 할 일이란 시를 발표하고 난 뒤, 적게 나마 받은 원고료로 곱창 구이에 소주나 마시면서 이 지긋지긋한 세상의 썰렁한 유머나 곱씹으며 하루 해를 날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소위 ‘시적으로 잘 나간다’는 시인들의 소임이라 생각한다. 비꼬는 게 아니다. 세상에 무용한 시인들은 그 철저한 무용성에 스스로를 투신함으로써 비로소 유용해지기 때문이다.

시적 개성이나 시인의 생물학적 나이대를 염두에 둔 채 주절거린 얘기지만, 시인의 나이와 작품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게 애당초 틀려먹은 접근법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정남식의 시들은 그 나이 시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장점과 보여줄 수 없는 특장들을 거칠게나마 동시에 나열하고 있어 흥미롭다. 위에 든 ‘잘 나가는’ 시인들이라면 무의식적으로나마 통일된 체계를 완성하려 조금 더 손을 댔을 지점에서 손을 ‘확’ 떼어버린 느낌이다.

그것은 전통 서정시 풍의 자연교감적인 시들을 1부와 3부에, 첫 시집에서 보여줬던 극단적 언어 파괴의 시들을 2부와 4부에 사이 좋게 배치한 데서 우선 드러난다.

해설을 쓴 평론가 김진수는 이 상반된 어조의 배치가 ‘서로에 대한 알리바이’로 작용한다고 풀이했거니와 정남식은 나름의 시적 자장을 형성하는 두 개의 어조 사이를 끊임없이 반복운동한다. 그 부단한 운동성 자체가 이 시집이 가지고 있는 내적 에너지의 근본 동력이다. 두 어조를 대표할 만한 시 두 편을 나열해 본다.

굴참나무 뒤로 계곡 물이 흐른다/ 물소리 점차 불어나고 이내 어두워졌다/ 큰 물소리를 귀에 베고/ 휴양림 산막에 누웠다// 굴참나무처럼 서 있었다// 소리도 없이 번개가 산 너머에서/빛을 냈다// 불안한 귀로 보았다/ 번개 불빛에 뼈처럼 드러난 물살들/네 살이 확, 넘쳤다

- ‘굴참나무 밑에서’ 전문

마침내 빈 소주병을 빈 잔에 따른다… 그리고 空술을 마신다… 몸에 독처럼 퍼지는 空! 공의 독에 취해 술값도 잊은 채 쳐들린 얼의 窟, 얼굴로 주점 문턱을 초과한다… 아낙이 노를 저으며 내 후한 얼굴에 쌍욕의 더깨 그득 묻힌 침의 그물을 던지지만, 내 감각은 이미 해체되어 얼굴 속의 얼의 굴, 이목구비 속에 覺자 화두로 각기 청각 시각 미각 후각으로 상호 교통하며 錯覺境에 들어가 있다

- ‘굴속에 들어가기’ 부분


첫 번째 시를 ‘교감’이라 한다면 두 번째 시는 ‘착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만물과의 평화로운 교감은 ‘이목구비 속에 覺자 화두로 각기 청각 시각 미각 후각으로 상호 교통하며 錯覺境’에 빠져보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다. 대개의 경우 시인은 연배가 쌓이고 시적 연륜이 깊어질수록 착란에서 교감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나는 그런 노정을 무작정 시적 발전이라 부르는 데 반대한다. 자아와 세계 사이의 혼미한 연결 지점에서 혼란스런 착란을 거치지 않은 교감은 자칫 정신의 가장 치열한 부분을 제외시킨 무기력한 자기 위안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남식은 아직 채 통일되지 않은 시적 우주의 혼란스런 두 얼굴을 명백한 대조법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어느 쪽이 좋고 나쁨으로 단번에 귀결되지 않는다. 그 판단 불가능한 대조적 어조 사이에서 정남식의 시적 건강미가 나타난다. 그건 ‘잠정적으로 합일된 영원한 불화의 지점’이다. 그 지점에서 정남식은 여전히 언어 바깥을 꿈꾼다. 그의 시집엔 문학 청년의 불꽃 같은 패기와 불혹을 넘긴 남자로서의 나른한 시각이 혼성 교배되어 있다. 그 뒤죽박죽된 사시(斜視)의 시각이 그의 시에 남다른 빛을 낸다.

김민정의 시를 정남식의 시와 맞물려 얘기하고 싶은 건 이런 이유다. 김민정의 시는 정남식이 아직 한쪽 눈을 빠뜨려 놓고 있는 ‘錯覺境’ 속에 숫제 온몸을 담근 형국이다.

따라서 그녀의 시엔 우리가 흔히 시라고 부르는 언어의 효율적 운용과 조탁이 전무하다. 과연 이걸 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며 자문하는 것조차 부질없을 정도로 그녀의 시를 읽는 건 무차별적으로 난자된 감각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에 진배없다. 김민정의 무의식은 잠재되어 있지 않고 성마른 송아지 뿔처럼 울긋불긋 튀어나와 있다.

그 흉측한 뿔로 걸리는 모든 것들을 저돌적으로 들이받으며 미친 듯이 날뛴다. 언어는 산산조각나고 이미지들은 엽기 동영상에서 생짜로 끄집어낸 듯 극악한 희극으로 좌충우돌한다. 시집 전체에 만개해있는 미친 희극미의 일부분이다.

딸랑이를 흔들어주려 자크를 내리자 개구리의 배가 열십자 드라이버로 갈린다 온통 새까만 개흙으로 뒤덮인 내장 속으로 나는 삽질하는 밀랍인형에 태엽을 감아 밀어 넣는다 배 밖으로 흙을 퍼내는 태엽 감긴 밀랍인형의 삽에 줄줄이 걸려든다 내가 뽑아 감춘 사랑니, 내가 깎아 버린 손발톱, 내가 긁어 떨군 살비듬, 내가 밀어버린 물때, 내가 흘려보낸 피와 난자들…이,

- ‘내가 날 잘라 굽고 있는 밤 풍경’ 부분


이렇듯 그로테스크한 풍경들이 녹록치 않은 두께의 시집 전부를 채우고 있다고 봐도 과언 아니다. 이연주나 김언희 등이 보여줬던 여성적 악몽의 세계를 보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는 통시적 비평이 가능하겠으나 각각의 시인들을 일정한 해석 지평에 쓸어 담아 통째로 운위하는 일방적 자리배치는 내가 말할 바가 아니다.

단지, 각기 다른 사적 맥락에서 출발해 당대의 실질적 음향으로 거듭 생산되는 시인들의 여전히 생동하는 음성들에 귀 막고 있는 현실에 가끔씩 화만 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요즘 한국 시인들의 착하고 따뜻한 음성에 진저리가 쳐진다. 세상은 더 없이 복잡하고 난분분하고 화를 돋우는 일 투성이인데, 요즘 쓰여지는 시들은 왜 그토록 결 고운 아름다움에 침잠해 있는 지 모르겠다.

내적 분열과 고뇌를 삭이고 우려 진중하게 뽑아내는 소리의 참맛을 모르지 않지만, 현실엔 파바로티의 노래만으로는 반향이 불가능한 다양한 결들과 부침과 마찰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조용필의 구성진 절규도 필요하고 마음 속의 응어리를 대신 토해줄 들국화의 야성도 필요하다. 긴 어둠 속에서 ‘철갑 고래’를 타고 귀환한 정남식의 시와 인터넷 시대의 장광설로 내면의 지옥도를 그려보인 김민정의 시를 짝패로 읽으며 내 감각은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錯覺境’을 회복하려 애써본다.

아무래도 시인은 아직도 미쳐있을 필요가 있다. 곱창 구이에 소주를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배 나온 소년’들의 철없음에 세상아, 가끔씩은 미친 듯 동요해 보렴. 그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일이다, 젠장.



시인 nietz4@hk.co.kr

------ [한국일보 2005-05-30 2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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