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아직은 늦가을인데, 창 밖 멀리 바다에는 눈이 올 듯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네요. 자아, 그럼 작품의 의미적 국면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는 마지막 요소인 <배경(背景)>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실까요? 종래의 시에서는 이 문제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화자(話者)의 행동과 발언만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배경의 문제는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배경은 단지 작중 인물의 등장 무대 구실만 하는 게 아니라 존재(存在)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고, 같은 존재도 언제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며, 시의 화제(話題)가 화자나 청자지향형에서 배경을 대상으로 삼는 화제지향형으로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크게 <물리적(物理的) 배경>과 <상황적(常況的) 배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리적 배경은 <시간+공간>으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상황적 배경은 물리적 배경에 인간의 문제인 역사, 문화, 사회 등이 추가됩니다. 이들은 흔히 줄여 전자는 그냥 <배경(setting)>, 후자는 <상황(situ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자는 인적 요소들이 빠져 있기 때문에 정적(靜的)인 속성이 강합니다. 그리고 후자는 인간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어 가변적인 속성이 강합니다. 또 서정론(抒情論)에서는 배경을, 서사론(敍事論)에서는 상황을 더 중시합니다. 현재 시는 이 순간의 정서를 화제로 삼고, 서사는 사건의 진행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다시 작품에 그려진 <텍스트 속의 배경>과 그 작품의 대상이 존재했던 <실제(實際) 배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텍스트 속의 배경은 작중 인물의 등장 무대 노릇만 하는 <중성적 배경(neutral setting)>과, 인물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어떤 행동을 조장하거나 억제하는 <기능적(functional setting) 배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작품을 쓰려는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호에는 서정적 장르에서 중시하는 물리적 배경을 중심으로 슬슬 질문을 시작해 볼까요? 그럼, 질문 일발 장진합니다. 받으세요. 뿅!
▣당신은 <실제배경>과 <작품 속의 배경>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니 곰곰이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이들의 차이를 모르면 언제나 중성적 배경만 채택할 테니까요. 뭐라구요? 텍스트 속의 배경은 시적 대상이나 존재했던 실제배경을 모방적으로 그리는 게 아니냐구요? 에이, 땡입니다. 실제배경과 작품 속의 배경의 차이는 입체적인 현실을 문자로 기호화한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우선 실제배경은 <비의도적(非意圖的)>이고 <비인과적(非因果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까요? 지금 제 책상 위에는 램프 옆에 책받침대가 있고, 그 위에 이 글 초고의 프린트한 것들이 올려져 있고, 그 앞에는 스탬플러와 철침을 뽑는 도구, 다시 그 옆에는 라이터, 핸드폰, 재떨이, 지갑, 연필꽂이, 전화기, 화상 통신을 위한 PC 카메라와 마이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바람에 펄럭이는 연분홍 커텐과 바다가 보이는 유리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그저 우연히 놓여져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실제배경을 이루는 사물들은 우연히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이들 가운데 그 작품의 테마와 관계 있는 것들만 골라서 표현해야 합니다. 가령, ´글쓰기의 어려움´을 주제로 삼아 글을 쓴다고 합시다. 이 경우, 핸드폰, 지갑, 화상 통신 기구들은 빠져야 합니다. 이들은 글 쓰기의 어려움에 별다른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텍스트 속의 배경은 그 <테마에 알맞은 것만 골라 의도적으로 배치한 풍경>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필요 없는 것들도 글을 쓰는 사람이 동기를 부여(motivation)하면서 인과관계를 맺어주면 달라집니다. 제 책상 위의 PC 카메라와 마이크는 지난 해부터 인터넷에 구축하고 있는 <한국문학도서관> 서울 프로그램팀과 업무를 연락하기 위해서이고, 탁상용 전화기가 있는데도 핸드폰을 함께 올려 놓은 것은 사방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 위해서이고,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어야 할 지갑이 나와 있는 것은 방금 신문값을 받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문값을 주고 지갑을 책상 위에 펄썩 던지면서 원고 마감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그때 컴퓨터 화면에서 뿅하며 화상 통신을 요청하는 신호음이 울렸다. 그리고 핸드폰과 탁상용 전화가 한꺼번에 울렸다. 아, 아. 이 원고를 언제 마치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라고 인과관계를 맺어주면 불필요하게 보이던 것들도 모두 필요한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텍스트 속의 시간과 공간은 작중 인물의 것으로서, 실제배경을 작품 속으로 옮겨올 때는 인물의 심리 상태에 따라 <확대>·<대등>·<축소>·<삭제>되어 나타납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술시(戌時)의 항구,
노인 한 분이 낚싯대를 접고
선술집 벽에 기대어 졸고 있다.
벽에 걸린 그림 속,
바람을 안은 프랑스 범선(帆船)이 한껏 부풀어오르고
등 푸른 참치 떼가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데
그때마다 하이얀 비말(飛沫)이 갑판을 쌔리는데
술시의 항구,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바다를 깔고 앉아 노인이 졸고 있다. - 강중훈, [술시의 선술집 간판] 전문
술시(戌時)는 밤 7시에서 9시 사이입니다. 이 시각 선술집 안에는 ´프랑스 범선´을 그린 액자만 걸려있을 리가 없습니다. 노인이 앉아 있는 탁자와 의자도 있을 테고, 겨울철이라면 난로가 켜져 있을 테고, 그 위에는 물주전도 있을 테고, 주방에서는 부글부글 술안주가 끓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자 속 풍경만을 확대하여 묘사한 것은 액자 속의 바다는 고기가 풍부한 살아 있는 바다임에 비하여 노인의 바다는 어족 자원이 고갈된 바다고, 그로 인해 인간의 삶마저 활기를 잃었음을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액자 속의 바다는 이 작품의 테마를 드러내기 위해 확대(擴大)된 <은유의 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기능적인 배경이 되려면, 작중 인물의 성격(character)을 드러내고, 그의 욕망을 실현하기에 적합하도록 조직되어야 합니다.
밤비가 내리네 어둠을 흔들며 조용히 내리네
그리움이 늘어선 언덕에 마른 수수잎 소리가 들리네
아련한 파도 소리 고향집 울타리에 철석이는데
낮닭 우는 소리도 가슴에 차오르네. - 차한수(車漢洙), [손·47 : 고향] 전문
이 시는 꼭 비가 내리는 밤에 썼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환한 대낮이나 폭풍우 치는 밤에 썼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밤에 썼었어도 다른 것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낮으로 설정했다면 이만큼 절실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용히 내리는 비와 어둠은 누구나 생각에 젖어들게 만듭니다. 그런데, 대낮으로 설정하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폭풍우 치는 밤으로 설정하면 어색한 작품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 밤에는 누구나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기능적인 배경이 되려면 그 배경이 화자의 심리 상태를 은유해야 합니다. 다음 작품은 1930년대에 쓰여진 것으로서 그리 상큼한 맛은 없지만 풍경 전체가 작중 인물의 심리상태를 은유하고 있습니다.
일층(一層)위에있는이층(二層)위에있는삼층(三層)위에있는옥상정원에올라서남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북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옥상정원(屋上庭園)밑에있는삼층밑에있는이층밑에있는일층으로내려간즉동(東)쪽에서솟아오른태양(太陽)이서(西)쪽으로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서쪽에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시계(時計)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시간(時間)은맞는것이지만시계는나보담도젊지않으냐하는것보담은나는시계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시계를내동댕이처버리고말았다. - 이상(李箱), [운동(運動)] 전문
다른 사람이 이 작품을 썼다면 아마 ´옥상 정원 올라서…´부터 쓰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1층에서부터 2층과 3층을 거쳐 옥상까지 올라가는 과정을 모두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려오는 과정도 각층을 모두 거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띄어쓰기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을 심리학적인 방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반복을 상동증(常同症)이니 음송증(音誦症)이니 하고, 무엇인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울 때 나타나는 병리 현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드러내는 이 작품은 인생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시인의 가치관 내지 작품의 테마를 은유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배경의 기능에 대해서는 이쯤 이야기하고, 다시 다른 질문을 해볼까요? 자기 받을 준비 됐어? 사아알작 쏠께. 빵!
▣ 당신은 테마나 화자에 따라 어떤 배경을 선택하십니까?
그냥 별다른 생각이 없이 쓴다구요? 그러면 안 되지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텍스트 속에 등장하는 배경의 유형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텍스트 속의 배경은 크게 <사실적(事實的) 배경>·<가정적(假定的) 배경>·<심리적(心理的) 배경>·<창조적(創造的) 배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화적(神話的) 배경>을 추가할 수도 있습니다. 신화적 배경은 모든 사물이 살아 움직이는 배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토끼와 다람쥐가 이야기하고, 꽃이 방긋방긋 웃는 것으로 그려진 세상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묘사는 시인이 수식(修飾)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면 심리적인 배경에 포함시켜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사실적 배경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세상을 말합니다. 또, 가정적 배경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조건이 실현되는 세상을 말하고, 심리적 배경은 어떤 특정한 순간에 마음 속에 드려진 세상을 말하고, 창조적 배경은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든 세상을 말합니다. 이들의 전체 구조는 어느 유형이든 모두 현실 세계를 바탕으로 삼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유형에 따라 배경소(背景素)의 모습이 달라질 뿐입니다. 그리고, 화자의 정서나 화제를 부각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거나 변형시킵니다. 아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사실적 배경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의 추억을 환기시키기 위해 아득한 옛날에 물 속에 잠긴 ´소나무´와 그에 걸렸던 ´방패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물 속을 들여다보면 방패연 하나 늙은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습니다
´아버지´하고 부르면 메아리 대신 솟아오르는 달
고향 하늘 물이 넘쳐 팔월 보름달이 잠긴다. - 이무원(李茂原), [수몰지구(水沒地區)]에서
이와 같은 사실적 배경을 채택하면 작중 상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어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는데 용이합니다. 하지만, 배경소들을 섬세하게 그리지 않으면, 중성적(中性的)이거나 <장식적 배경(decorative setting)>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배경소들을 ´특정한 순간의 특정한 모습´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적 배경은 화자의 성이나 연령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선 계절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봄>과 <가을>은 여성적이되, 전자는 순진·화려·화사한 정서를, 후자는 성숙·고뇌·우울의 정서를 나타내는데 적합합니다. 그리고 <여름>과 <겨울>은 남성적이되, 전자는 성장·성취·기쁨·정열을, 후자는 정지·좌절·절망·엄숙의 정서를 나타내는데 적합합니다. 또 연령과 관계지으면, 봄은 유년기에, 여름은 청·장년기에, 가을은 노년기에, 겨울은 죽음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주기를 <빛의 시간>·<어둠의 시간>·<경계의 시간>으로 나누어 살필 경우, 빛의 시간에는 남성적 성격(animus), 어둠의 시간에는 여성적 성격(anima)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는 공간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간의 유형을 <열린 공간>, <닫힌 공간>, <경계의 공간>으로 나눌 경우, 열린 공간에서는 남성적 성격이 강화됩니다. 그리고 닫힌 공간에서는 여성적 성격이 강화되고, 경계의 공간에서는 여성화된 남성이나 남성화된 여성의 성격이 강화됩니다. 다음 이육사(李陸史)의 시만 해도 그렇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중략)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에서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 [황혼]에서
ⓐ에서 시인이 전달하려는 것은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에게 자기 노래를 ´목놓아 부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주 남성적인 테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겨울>과 <열린 공간>을 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반면에 ⓑ에서 전달하려는 것은 수인(囚人)의 외로움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외로움이 아닙니다. 독립 운동을 하다가 갇힌 투사의 외로움입니다. 따라서 남성이긴 하되 여성성을 띄기 시작하는 여성화된 남성화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서서히 여성화되기 시작하는 황혼의 시간과 닫힌 공간을 선택한 것도 이들이 지닌 속성을 이용하여 화자의 외로움을 돋보이도록 하려는 계산에서입니다. 프라이(N. Frye)의 설명에 의하면, 이와 같이 공간과 시간의 유형에 따라 어느 한 쪽의 성이 강화되고, 정서가 달라지는 것은 자연 현상에 대한 은유적 해석이 조상 대대로부터 축적되어 온 결과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밤이 되면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생각에 젖어들고, 넓은 곳으로 나가면 활동적이고, 좁은 곳에서는 행동을 작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으로 보이게 만든 결과라고 봅니다. <가정적 배경>은 화자의 성이나 연령과는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대신 진리, 도, 윤리 같은 <공적>·<도덕적> 화제를 취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그로 인해 화자의 발언이나 행동은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격정적인 순간에도 균형과 절제를 잃지 않습니다. 그것은 담화 속의 사건이 현실의 사건이 아니라 가상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인용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화자는 사랑하는 님이 떠날 때 꽃까지 뿌려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복권에 당첨된다면, 너에게 반을 줄께´하는 식의 발언으로서, 거의 믿을 게 못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어색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현실의 이별이 아니라 가상의 이별이라서 그렇게 말한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가정적 배경을 채택하면 배경소들이 추상적으로 그려진다는 게 약점입니다. 그것은 화자의 발언에만 초점을 맞추고, 배경을 그리는 데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시가 되지 않도록 배경의 모습을 구체화하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심리적 배경>은 어느 순간 자기 마음의 창에 비친 배경을 그대로 그린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창에 비친 풍경을 그리기 때문에 앞의 두 유형과 달리 현실의 세계와 아주 다른 모습을 띄게 됩니다.
초사흘 달빛이 가늘게 내리는 저녁… 희디흰 그리움 한 올 한 올 풀어 비뚤어진 내 눈썹 위에 살짝 붙이고,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대 불러 옆에 눕히고, 왼 쪽 갈비뼈 하나 뽑아 내 갈비뼈를 만들려 하나니. 돌아 누우라, 그대여. 나를 향해 돌아 누우라.
푸르른 달빛이
비껴 내리는
그대 갈비뼈 사이
느릅나무 잎새 하나가 가뭇가뭇 진다. -현희, [달빛 소곡(小曲)] 전문
이 작품의 테마는 외로움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므로, 여성화자를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닫힌 공간인 ´방´과 어둠의 시간인 ´밤´을 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밤에 혼자 잠자리에 들면 외롭기 때문에 그렇게 설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부분은 사실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줄 한 줄 띄어 쓰고, 몸을 공간화하면서 ´갈비뼈 사이/느릅나무 잎새 하나가 가뭇가뭇 진다´라는 뒷부분은 심리적 배경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풍경은 무심코 떠오르는 무의식적 환상을 수정하지 않고 옮겨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배경은 화제가 시인을 자극하여 만들어낸 풍경을 바탕으로 삼기 때문에 이미 테마와 배경이 상호 결합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이런 배경은 기능적 배경이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진부한 화제도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현실적 자극이 마음의 창에 비춰지는 과정에서 일상의 탈을 벗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배경들은 의식의 안팎에 존재하는 풍경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창조적 배경은 언어에 남아 있는 사물성(事物性)을 이용하여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려는 배경을 말합니다. 예컨대, 김춘수(金春洙)의 후기시인 ´무의미시(無意味詩)´나 이승훈(李昇薰)의 ´비대상시(非對象詩)´가 이런 예에 속합니다.
벽(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 회랑(回廊)의 벽에 걸린 청동 시계(靑銅時計)가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 [처용단장] 제1부 3
이 작품의 사물들은 앞의 작품과 달리 어떤 관념이나 심리 상태를 은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앞 작품의 공간소들은 모두 ´그리움´에 연결된 치환은유적(epiphoric) 구조를 취하는 반면에, 이 작품의 ´벽´·´홰나무´·´청동시계´·´바다´ 등은 [T(?)=V[(t1)=v1/(t2)=v2/…/(tn)=vn] 식으로 나열된 병치은유적(diaphoric) 구조로서, 전체의 의미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질적인 보조관념군(補助觀念群)을 인과관계를 배제한 채 병치한 것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 : 1>로 치환되어 의미가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시인이 지시하는 어떤 관념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그 무엇을 창조하기 위해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조적 배경을 채택하면 모든 배경소들이 서로 결합하고 분열을 일으키면서 제2 제3의 풍경으로 바뀌어 참신감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독자들은 자기 경험과 크게 어긋난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무의미한 언어 유희로 받아들인다는 게 문제입니다. 자아, 그럼 또 다른 질문을 해볼까요?
▣당신은 선택한 배경이 부자연스러울 때 어떻게 조절하십니까? 무슨 소리냐구요?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라구요? 그럼 다시 하지요. 어떤 남자가 대낮 큰길에서 울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배경을 그대로 채택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느냐구요? 굳이 그러고 싶다면 그대로 쓰는 방법밖에 더 있느냐구요? 그럼 다 큰 어른이 질질 짜는 게 부자연스럽게 보일텐데요. 이 문제는 다음 작품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왼몸이 달어… - 서정주, [대낮]에서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대낮입니다. 그런데도 밤이나 일어날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것도 방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좀 찐하긴 해도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지요? 이와 같이 화자의 행위와 배경의 성격이 어긋날 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가 뭐냐는 겁니다. 잘 모르시겠다구요? 그럼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에는 몇 가지 장치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우선 그런 욕망이 어느 정도 타당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밤처럼´이란 보조관념을 동원하여 어둠의 이미지를 첨가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낮이면서도 밤으로 만든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고요한´ 상태로 묘사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깥으로 설정했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노출되기 쉬운 전면(前面)이 아니라 꽃으로 가려진 ´사이 길´로 점을 잡은 들 수 있습니다. 밤이라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이라면 풍기문란죄(風紀紊亂罪)로 끌려갈 테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자의 의식 상태가 정상적이 아닌 것으로 그린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핫슈를 먹어 취해 나자빠진´이나 ´능구렝이 같은 등어릿길´이 그런 증상을 드러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구절은 마약을 먹은 것처럼 비정상적임을 의미하고, 뒤의 구절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닌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아, 미당(未堂)의 비결을 요약해 봅시다.
화자의 의식 상태가 정상적인 아님을 보여주고 시간적 배경에는 <빛의 시간>일 경우 <어둠>, <어둠의 시간>일 경우에는 <빛> 첨가하고 공간적 배경은 <열린 공간>일 경우 <닫힘>, <닫힌 공간>일 경우에는 <열림>의 색채를 가미하면 됩니다.
이렇게 엇갈리게 짜면 한결 더 짜릿하고도 조마조마한 작품이 됩니다. 아무리 어둠을 색칠하고, 꽃밭으로 주변의 시선을 막아도 여전히 바깥이고 대낮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장치를 설치해 둬도 독자들이 주목하지 않으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주목하도록 시선을 끌 장치를 함께 붙여줘야 합니다. 이 작품에서 ´핫슈´,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 같은 등어릿길´,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 등의 어휘간의 결합이나 음운조직이 그런 장치 노릇을 합니다. 왜냐구요? ´핫슈´는 아편입니다. 아편이라면 금방 그 의미를 알아들어 주목하지를 않지만, 핫슈는 우리말이 아니라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알았기 때문에 오랜 동안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동안 아편을 먹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여 화자의 행동을 용인하게 됩니다. 또 ´취해 나자빠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자빠진´ 비속어가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능구렁이같은 등어릿길´은 미끈거리는 유음(流音, r)과 음성모음의 연속, 남성 성기의 상징인 뱀이 결합하여 성적 장면을 연상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는 엉뚱하게 향기와 결합시켰기 때문에,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은 <밤→대낮>, <고요→끓음>처럼 상반되거나 엉뚱한 것으로 연결시켰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막아 줍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어휘론적 차원이나 음성학 차원의 변조는 의미론적 차원의 변조보다 훨씬 약합니다. 독자들은 무엇보다 의미로 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은 완전히 변조하고 있습니다.
시계는 열 두 점, 열 세 점, 열 네 점을 치더라.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엎드려 나는 이름을 부른다. 이름은 가혹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집이여. 손가락들이 고통을 견디는 집에서, 한밤의 경련 속에서, 금이 가는 애정 속에서 이름 부른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밤, 더욱 시린 밤은 참을 수는 없는 강가에서 배를 부르며 나는 일어나야 한다. 누우런 아침 해 몰려오는 집에서 나는 포복한다. 진득진득한 목소리로 이름 부른다. 펄럭이는 잿빛,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 경련하는 존재여, 너의 이름을 이제 내가 펄럭이게 한다. - 이승훈(李昇薰), [이름 부른다] 전문
이 작품에는 독자의 시선을 끄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벽시계는 열두 번 이상 울리지 않게 만듭니다. 그런데, ´열세 점, 열네 점´까지 울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밤중에 못을 박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자기 ´이름´을 부르며 울고, ´집´과 ´이름´이 종잇장처럼 휘날리며, ´밤´이 경련하면서 균열을 일으킨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배경소들을 왜곡시킨 것은 독자에게 화자가 처한 상황과 정서 상태가 정상적이 아님을 유의하며 읽어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그냥 ´시계가 끝없이 울린다´면 독자들은 무심코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밤이 깊어감에 따라 불안이 가중된다는 사실을 은유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를 유의하여 읽어 달라고 ´열 두 점, 열 세 점, 열 네 점´ 울린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자아, 하나만 더 질문하고 이번 호도 마감하기로 할까요? 준비하세요. 쏩니다. 뿅, 뿅, 뿅!
▣작품 속의 배경은 어떻게 변천해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할 게 있다구요? 뭡니까? 왜 매호 끝날 때마다 <화자의 유형은 어떻게 변천해왔는가>, <화제의 유형은 어떻게 변천해왔는가> 하는 식의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느냐구요? 눈치채셨군요. 제가 이와 같이 변천의 문제를 되풀이하여 질문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는 시인이 되려면, 문학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걸 몰라도 작품만 잘 쓰면 되지 않느냐구요? 얼른 납득이 안 되신다면 대중 음악을 예로 들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 청년 시절에는 이미자(李美子)씨의 노래가 아주 인기 좋았습니다. 목소리도 좋고, 가락도 애절하고…. 그래서 이미자씨가 죽으면 그분의 성대(聲帶)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미리 예약해 두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 집 공주님들은 차 속에서 그런 테이프를 틀면 ´아빠! 귀 버려.´하고 요즘 유행하는 테이프를 갈아 끼웁니다. 그건 이미자씨가 노래를 잘못 불러서가 아닙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청중(독자)들의 감수성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의 진행 방향을 모르면 옛날의 감각을 고집하게 됩니다. 자아, 이젠 시 속의 배경이 어떻게 변천해왔는가를 말씀해 보시지요? 그쯤은 잘 안다구요? 그래 뭡니까? <신화적 배경→가정적 배경→사실적 배경→심리적 배경→창조적 배경> 순이라구요? 어쩐 일이세요? 맞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