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시상을 선정하고 나면 서둘러 작품을 쓰기 시작합니다. 마음 속에 들끓으면서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시상들을 놓히지 않고 다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과 어서 작품으로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곧바로 작품으로 쓸 경우 자칫하면 시와 산문의 중간인 어설픈 작품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짜임새가 없는 작품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대상을 정서 상태로 인식하기보다는 산문화하여 인식하고, 정리되지 않은 시상을 작품으로 쓸 경우 그 시상에만 빠져 문자언어가 갖춰야 할 요소들을 고루 부각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상이 떠오르면 그걸 놓히지 않도록 메모를 하고, 다음과 같은 것들을 검토해 봐야 합니다.
1.우선 시의 제재로 적합한가를 검토하라
이 세상에 좋고 나쁜 글감은 따로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 글감이 그 장르에 적합한가, 그리고 장르의 관습에 맞추어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일요일에 친구들과 함께 등산한 이야기를 글로 쓰려 한다고 합시다. 그는 아마 등산하기 위해 화요일이나 수요일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을 테고, 일요일 아침에 역에서 친구들과 모여 열차를 타고 산 어귀에 도착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산에 오르고, 정상 부근에서 아주 오래된 ´산막(山幕)´을 발견하고 그 옆에서 도시락을 먹으면서 인생을 토론할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아주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겪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가운데 <과정>을 그리면서 자기가 생각한 <교훈>을 덧붙이려면 수필로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반대로 <느낌>이나 <상상>한 것을 쓰려면 시로 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독자의 눈앞에 <재현>해 보이려면 희곡으로, <과정>만 그리려면 소설로, 그 산의 위치나 높이, 식생(植生) 등을 소개하려면 설명문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참고로 글감과 장르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어떤 사건을 겪는 과정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 중 독자에게 <교훈(敎訓)>이 될만한 것을 골라 전달하려는 담화 - 교술적(敎述的) 담화(수필)
②어떤 사건을 겪고 난 다음 그에 대한 자신의 <현재 심정(心情)>과 <상상한 것>을 이야기하려는 담화 - 서정적(抒情的) 담화
③어떤 사건을 겪고 난 다음 <그 과정(過程)>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담화 - 서사적(敍事的) 담화
④어떤 사건을 겪고 <그 과정과 모습을 재현(再顯)>해 보이려는 담화 - 극적(劇的) 담화
⑤어떤 <글의 구조와 짜임>에 대해 <설명하고 평가>하려는 담화 -메타(meta-discourse) 담화(비평적 담화)
이와 같이 쓰고 싶은 것을 결정한 다음에는, 그 중에서 어떤 것을 강조하고 싶은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등산하는 과정에서 작품 속에 나타난 것만 생각하거나 상상했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막´에 대한 생각과 상상한 것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빈 산막(山幕)엔
능구렁이처럼 무겁게 살찐 고요가
땅바닥에 배를 깔고 숨을 몰아쉬고 있습니다.
흙담이 무너져 내려 썩고, 나무 기둥이며 문살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썩고 썩어
향기로운 부식(腐蝕)의 냄새를 피워 올리는,
이 버려진 산막 하나가 고스란히 해묵은 포도주처럼
맑은 달빛과 바람 소리와 이슬을 먹고 발효하는
심산(深山)의 특산품인 것을.
---신(神)이 가끔 그 속을 들여다보신다.
- 이수익(李秀翼), [폐가(廢家)] 전문
이와 같이 제재와 장르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려면 러시아 형식주의인 토마쉐프스키(B. Toma evski)가 나눈 모티프(motif) 속성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주제론(Thematics)]에서 모든 담화(문학작품)는 모티프의 집합이고, 모티프는 문장(sentence)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기능은 주제(theme)가 맡는다면서, <한정(限定) 모티프>·<자유(自由) 모티프>·<동적(動的) 모티프>·<정적(靜的) 모티프>로 나눕니다.
그가 말한 <한정 모티프>는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단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유 모티프>는 생략해도 이야기의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단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애인을 만나러 간다고 합시다. 만나러 간다는 사실은 빼 놓을 수 없는 단위로서 한정모티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갔다든지, 차창 밖으로 흰구름을 바라보며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갔다면 자유모티프에 속합니다. 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있고, 흰구름을 바라보는 대신 음악을 들으며 갈 수도 있고, 아예 빼도 무방하기 때문입니다.
<동적 모티프>는 ´뛰었다´나 ´결혼했다´와 같이 정황(情況)의 변화를 묘사하는 단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정적 모티프>는 ´그녀는 아름답다´와 같이 정황을 묘사하는 단위를 말합니다.
이 가운데, 동적 모티프가 강한 제재는 아무래도 산문으로 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움직이나 변화는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의미하며, 결국 과정을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유 모티프나 정적 모티프가 강한 제재는 서정이나 교술의 양식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서정시는 과정을 배제하고 현재 이 순간의 정서나 상상을 다루기 위한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장르든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는 자유 모티프를 발견하고, 그것을 정적 모티프로 바꾸는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할머니들의 경우를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들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소설이나 시로 쓴다면 몇 권도 넘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품으로 쓰는 분들이 드뭅니다. 그것은 한정 모티프와 동적 모티프를 가지고 있으나, 자유 모티프를 발견할 능력이 부족하고, 그것을 정적 모티프로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적 모티프를 구사하는 능력은 사물을 꼼꼼히 관찰하고, 빠뜨리지 않고 묘사하는 방법으로 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 모티프를 발견하는 능력은 훈련으로는 길러지지 않습니다. 의식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의 시상을 새롭게 바꾸는 몇 가지 방법들에 따라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거듭하면서, 독서와 사색을 통해 생각이 자유로워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지향성을 살펴봐야 한다.
화제의 유형은 <누구를 향한 이야기냐>라는 지향성(志向性)에 따라 나눌 수 있습니다. 야콥슨(R. Jakobson)은 이와 같은 지향성(志向性)에 따라 화제의 유형을 <화자 지향형> <청자 지향형> <화제 지향형>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정적 담화의 화제는 어떤 유형이든 궁극적으로 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내가 생각하는 나>·<내가 생각하는 너>·<내가 생각하는 그>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유형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나>와 <너>가 등장하여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유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화자가 주로 이야기를 하되 청자가 간혹 틈입(闖入)하여 <나-너-그>가 전부 등장하는 유형이 이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유형을 <극적 지향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지향성에 따른 화제의 유형은 모두 4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화자 지향형
<나는 이런 일을 겪고 난 다음 이런 생각을 했다>는 화제는 이야기의 방향이 화자 자신을 향하므로 <화자 지향형> 또는 <1인칭(一人稱) 지향형>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모두 화자 지향형은 아닙니다. 자아가 둘로 분리하여 하나의 자아가 다른 자아를 관찰자하며 이야기할 경우에는 화제 지향형으로 바뀝니다. 따라서 화자 지향형이란 아래 작품처럼 <나>의 주관적인 정서나 상상을 다루는 유형으로 제한해야 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千祥炳), [귀천(歸天):주일(主日)] 전문
이 작품의 주된 화제는 자기가 죽어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날, 그래도 지상의 삶은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는 시인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정서는 그냥 발생하는 게 아닙니다.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을 받고,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전망>할 때 발생합니다. 그로 인해 이런 화제를 취할 경우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나 <미래의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나는 <서술 화자(state persona)>가 되고, 과거나 미래의 나는 <초점 화자(focalized persona)>가 됩니다.
다음 작품에서도 동일한 ´나´가 서술화자와 초점화자로 분리되고 있습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 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전문
이 작품의 표면에는 <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어를 생략하는 우리 말의 관습 때문일 뿐, <나는 예전에 달이 아무리 밝아도 쳐다볼 줄 몰랐다>라는 이야기로서, 과거의 자아에 대한 현재 내 감정을 화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체는 현재의 나이지만, 이야기의 초점은 과거의 나에 및춰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서술화자에 의해 초점화자의 행위가 밝혀지고, 그에 대한 느낌과 판단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천상병의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이가 난다면 <미래의 나>에 대한 초점이 약화되었다는 점뿐입니다. 이렇게 미래의 나를 약화시킨 것은, 이 세상이 그래도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는 현재 나에 초점을 맞추어 현실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화자 지향형을 채택하면, 표현의 기능이 강화됩니다. 자기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며, 애초 유형을 택한 것은 화자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의 자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현재보다 과거나 미래 쪽이 더 이상적으로 그려지며, 그로 인해 회고적(回顧的) 영탄적(詠嘆的)·감상적(感傷的) 어조를 띠는 것이 보통입니다. 천상병의 작품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나, 김소월의 작품에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구절이 그런 어조를 드러내는 곳입니다. 이런 반복은 현실에서는 미래나 과거로 갈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무의식 속에서는 그쪽으로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황이 변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고착적(固着的) 정서를 보이는 걸 감상주의(sentimentalism)라고 한다면, 이 유형의 화제는 근본적으로 감상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청자 지향형
청자 지향형은 <너>에 대한 이야기로서, <2인칭 지향형>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런 화제는 <너는 이렇게 했느냐?>라든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의문 명령 애원 요청 호소의 성격을 띄어야 합니다. <너>를 화제로 삼았어도 화자의 판단이나 요구를 정지하고, 청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려 할 경우는 <화자 지향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청자지향형으로 분류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청자 지향형의 화제는 크게 <나는 너를 이렇게 생각한다(판단)>와 <너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요구)>라는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때 화자의 판단과 청자에 대한 요구는 보편적 윤리와 관습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강렬하고도 단순한 어조를 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요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만들자면 보편 타당한 것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다음 작품은 청자 지향형의 대표적인 예에 해당합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에서
이 작품의 의미는 <껍데기는 부도덕하다(판단)>와 <그러므로 껍데기인 너는 물러가라(요구)>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껍데기´는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거짓된 인간들이거나 그들이 만들어 낸 제도(制度)와 관습 같은 것들로서, 화자가 청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화자가 청자보다 상위에 설 때에는 직설적인 어법과 강압적 자세를 취합니다.
반대로 하위(下位)에 설 때에는 아이러니를 비롯하여 역설 같은 완곡(婉曲) 어법을 택하고, 직설적인 어법을 택할 경우도 간절하게 청원하는 형식과 화려하고 수식적인 문체를 택합니다. 그리고 청자가 신처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일 때에는 기도·찬송·애원의 태도를 취합니다. 그것은 가급적 청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화자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입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파란 피- 가슴의 샘이 말라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내 침실(寢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 이상화(李相和), [나의 침실(寢室)로]에서
이 작품의 청자는 앞의 작품과는 달리 ´마돈나´라 불리는 특정인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함께 있어야 하며, ´대낮´으로 표상되는 <일상의 세계>보다 ´밤´으로 표상되는 <사랑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청자에게 ´침실´로 가자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자가 청자보다 어떤 삶이 더 소중한가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화자가 청자보다 상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남성화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평어체와 명령어법을 구사하고 있으나 오히려 수세(守勢)에 처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남성화자이면서도 화려한 수사를 구사하고, 간절한 어조로 애원하는 것이 그런 증거입니다. 그것은 청자가 자기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 대부분의 송가(頌歌)나 연시(戀詩)가 청자를 극단적으로 높이면서 간절한 어법을 택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3) 화제 지향형
화제 지향형은 청자에게 어떤 정보를 제공하려는 유형으로서, <내가 본 그 사람(그것)은 이렇다>라는 형식을 취합니다. 이 유형을 <3인칭 지향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나 <그것>를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유형에서는 문맥의 표면에 화자나 청자가 잠재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정서적 표현과 의미 부여를 억제하고, 카메라 렌즈로 사물을 비춰 보이듯 이미지화하려고 노력합니다. 화자나 청자를 드러내고, 정서적 표현을 강화할 경우 객관성이 부족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햇살은 모두
둑 밑에 내려와 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강 바람이
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시골 청년
자전거 바퀴 살에
햇살이 실려서
돌아간다
그 바퀴 살 사이로
투명한
강
얼마쯤 걸었을까
미루나무도 가고 있는지……
미루나무는 조금씩 작아져 갔다
- 한성기(韓性祺), [둑길.1]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자기가 걷고 있는 둑길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풍경들이 화자의 시선을 거쳐 들어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존재를 잠재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띠면 정보의 신뢰성이 떨어지기 잃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자의 정서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묘사하는 화자의 시각과 거리를 통해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청년´과 ´강´과 ´미루나무´를 뒤에 두고 한없이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그린 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쓸쓸한 심정을 은유하기 위한 객관적 상관물(相關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정적 장르에서 화제 지향형은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산문과 달리 상대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4)극적 지향형
앞에서 말했듯이 야콥슨은 화제의 지향성을 3가지로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형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화자가 어떤 정보를 이야기하되 간혹 청자가 개입하는 <극적 지향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음 작품이 이런 예에 해당합니다.
거리에서 우연히 아내를 만난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아내는 등 뒤에서
[여보, 여보!]하고 쫓아온다.
그래도 나는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
저녁 상을 가운데 놓고 아내와 마주 앉았다.
갑자기 서베이어 1호처럼
난데없이 사뿐히 착륙하는 얼굴.
[바로 저 얼굴이다!]
[뭐가 저 얼굴이예요?]
[아니, 서베이어 1호의 달 연착(軟着) 말이야]
이제는
신비의 베일도 벗겨지고
대재벌(大財閥)의 몰락처럼 쓸쓸한 얼굴
달.
- 김윤성(金潤成), [아내의 얼굴]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거리에서 아내를 만났는데 모른 척하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여보, 여보!´ 부르며 쫓아오고, 화자는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 독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내의 얼굴이 ´서베이어 1호´의 착륙으로 인하여 신비를 잃은 달 같다고 독백을 하자 아내가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고, 화자는 인공 위성 이야기를 했다고 둘러댑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화자(나)-화제(아내의 얼굴 또는 달)-청자(아내)>의 삼자 관계를 고루 지향하는 극적 지향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극적 지향성을 택하면, 1인칭 지향형의 주관적 정서와 의미 부여 기능, 2인칭 지향형의 상대에 대한 요구와 명령 기능, 3인칭 지향형의 객관적 자세와 이미지화 기능을 모두 수용할 수 있어 작중 상황이 눈에 보이듯 드러납니다. 반면에 간결성과 압축성이 떨어지고, 산문처럼 길어지며, 초점이 분산되기 쉽다는 것이 약점입니다. 종래의 시에서 극적 지향형을 택한 작품이 드문 것도 이런 단점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의 의도를 총체적(總體的)으로 표현하는 데 적합한 유형으로서, 현대시로 접어들면서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3.어디에 초점을 맞춰 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화제를 선택한 다음에는 어디에 <초점(focus)>을 맞춰 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다 같은 화제도 어디에 초점을 맞췄느냐에 따라 시의 유형과 특질이 달라지고, 독자의 반응과 문학적 평가도 어느 정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지나간 세대가 즐겼던 택하던 초점을 맞추게 되면 문학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맙니다.
이와 같은 초점의 유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에 초점을 맞춘 유형 - 관념형(觀念形)
2)대상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유형 - 즉물형(卽物形)
3)대상에 대한 자신의 무의식적 반응에 초점을 맞춘 유형 - 무의식형(無意識形)
4)대상의 의미나 모습을 추상적 논리에 의해 재편성한 것에 초점을 맞춘 유형 - 기호적 상징형(記號的象徵形)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네 가지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사람들은 이 가운데 ①과 ②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인 무의식에 초점을 맞추는 유형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시에서, 네 번째 유형은 기호나 도형 등을 이용하여 시적 대상을 다른 그 무엇으로 재편성하는 큐비즘(cubism), 미래파(futurism), 다다(Dada)의 시에서 발견되는 유형으로서, 현대시로 접어들어 비로소 채택된 초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초점의 유형에 따라 시의 유형과 특질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1) 관념형(觀念形)
이 유형은 감성(感性)을 바탕으로 시적 대상에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정서를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 유형으로서, 문예사조상으로는 ´낭만주의(浪漫主義)´ 이전의 시가 이에 해당합니다. 신비평 그룹의 지도자였던 랜섬(J. C. Ransom)은 이런 유형의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 워렌(R. P. Warren)은 ´순수시(Pure poetry)´, 이들의 선배격인 리처즈(I. A. Richards)는 ´배제의 시(Poetry of exclusion)´로 분류했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전달하려는 의미와 정서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명상의 흔적이 남아 있어 시인이나 독자들 모두 좋아합니다. 창작은 근본적으로 자기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행위이고, 독서는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고자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초점을 취하는 시는 시적 대상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이 대상의 모습이 추상화되어 언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사물로 제시된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 독자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형식이 되고, 독자들이 그런 강요를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정서를 강화하여 감상적인 상태로 몰고 가거나 규칙적인 리듬에 의지한다는 점입니다. 그로 인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새로운 것이 아니면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기 쉽습니다. 낭만주의 시가 흄(T. E. Hulme)을 비롯한 이미지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난 것도 이런 구조적 허약성 때문입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 김소월(金素月), [산유화(山有花)] 앞 부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산´은 어디에 있는 산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새´도 ´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산에는 사계절 꽃이 피고, 새는 꽃이 좋아 산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등장하는 사물들이 추상화되는 것은 시인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 그러니까 ´산´이나 ´꽃´으로 상징되는 자연은 항구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그런 자연 속에 사는 ´새´는 행복한 반면에, 인간 세계는 덧없고, 그 속에 사는 화자 역시 불행하다는 생각을 표현하는 데만 신경을 쓴 나머지 사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데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제도 그다지 새로울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보다 완벽한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①등장하는 사물들을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바뀌어 이미지화하고, ②화자가 말하는 대신 독자가 자연 속의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스스로 떠올릴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며, ③시인의 들뜬 정서를 좀더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할 것입니다.
2)즉물형(卽物形)
이 유형은 관념형과 반대로, 이성(理性)을 바탕으로 시적 대상의 물질적 외관(外觀)에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유형을 랜섬은 ´즉물시(卽物詩, physical poetry)´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워렌과 리차즈는 관념시와 마찬가지로 순수시와 배제의 시로 부릅니다. 그것은 시의 유형을 이성과 감성을 포괄했느냐 배제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 분류했기 때문입니다. 문예사조상으로는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이미지즘(Imagism)의 시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런 초점을 취하는 작품들은 사물들이 각기 다른 모습을 띄면서 선명하게 부각된다는 장점을 지닙니다. 반면에 관념시가 지녔던, 시인의 고뇌와 명상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의미없는 텅빈 그림(meaningless picture)´으로 떨어진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건반 위를 달리는 손가락
울리는 상아(象牙) 해안의 해소(海嘯)
때로는 꽃밭에 든 향내나는 말굽이다가
알프스 산정(山頂)의 눈사태
- 김광림(金光林), [음악]
이 작품은 앞에서 인용한 작품과 달리 시인이 ´음악´에 대해 제시한 의미나 정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대신 멀리 떨어져 있는 아프리카 ´상아 해안´의 만조 시각에 잘게 부서지는 ´파도´, 꽃밭을 짓달리는 ´말발굽´, 알프스 산정에서 부서져 내리는 ´눈사태´와 같이 특정(特定)한 순간에 특정한 사물의 이미지만 발견됩니다. 만일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고 음악을 아름답다든지 신비롭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시인이 부여한 의미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시를 쓰려면 우선 들뜬 정서가 차분히 가라앉히고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서 시적 대상의 모습을 꼼꼼하게 그려야 합니다. 그리고 가급적 리듬화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리듬화하면 리듬에 이끌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읽어 이미지가 지시하는 사물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초점을 택하면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하고, 독자들은 시인이 무얼 이야기하려 했나를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에 모두 답답해 합니다. 흄(T. E. Hulme)의 지도를 받아 이미지즘 운동에 앞장섰던 파운드(E. Pound)가 그 그룹에서 이탈하여 ´은유하는 그림(picture of metaphor)´을 추구하고, 파운드의 지도를 받아 문단에 나선 엘리어트(T. S. Eliot) 역시 사상과 감정이 융합된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 이론을 내세우면서 ´형이상시(形而上詩, metaphysical poetry)´ 운동을 전개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즉물형이 보다 완벽한 시로 바뀌기 위해서는 그림을 그리되 의미를 담은 그림으로 바꿔야 할 것입니다.
3) 무의식형(無意識形)
관념형이나 즉물형은 의식의 차원에서 인식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는 유형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무의식형은 의식의 밑바닥에 깔린 무의식적 심상에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상으로는 1920년대부터 전개된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의 작품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시를 비롯하여 <삼사 문학(三四文學)>, 1940년대 후반에 등장한 <후반기(後半期)> 동인들의 작품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부분적으로라도 이 초점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성적 통제를 풀면 우리의 의식 밑에 도사리고 있던 무의식적 심상들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심상들을 받아쓰기를 하듯 자동 기술(automatism)하는 방식으로 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의사가 시인에게 최면(催眠)을 건 상태에서 하는 이야기를 받아쓴다면 몰라도 시인 스스로가 수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융의 설명대로 <집단 무의식(集團無意識)>이나 <개인적(個人的) 무의식>은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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