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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문단·문인 동정

경남문단·문인 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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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병희
댓글 0건 조회 2,852회 작성일 2005-03-13

본문

'
ㅇ  당신은 주로 어떤 것을 시의 화제로 삼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화제의 유형을 내용에 따라 나눕니다. 문학의 경우, 농촌소설이니, 심리소설이니, 역사소설이니, 연시(戀詩)니 해양시(海洋詩)니 풍자시니 하는 분류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류는 매우 자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양시´를 인정하면 ´도시시(都市詩)´나 ´농촌시(農村詩)´를 인정하고, 다시 ´중산간(中山間) 시´니, ´종로(鍾路) 시´니 하는 것들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콥슨(R. Jakobson)은 화제의 유형을 지향성(志向性)에 따라 <화자(話者) 지향형(1인칭 지향형)> <청자(聽者) 지향형(2인칭 지향형)> <화제(話題) 지향형(3인칭 지향형)>으로 분류합니다. 이를 시적 담화와 연결할 경우, 시란 결국 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장르이므로, <내가 생각하는 나>·<내가 생각하는 너>·<내가 생각하는 그>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하면 지향성의 유형은 이 세 가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나>와 <너>가 등장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유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자가 주로 이야기하되 청자가 간혹 틈입(闖入)하는 유형으로서, <나-너-그>가 전부 등장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유형을 <극적(劇的) 지향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지향성에 따른 유형은 모두 4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제의 특질은 지향성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초점(focus)>입니다. 같은 지향형을 택해도 초점(focus)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담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시적 담화의 경우 초점의 유형은 크게 <관념형(觀念型)> <즉물형(卽物型)> <무의식형(無意識型)> <기호적 상징형(記號的象徵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관념형은 화자가 감성(感性)을 통해 획득한 의미나 정서를 표현하는 대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상으로는 낭만주의 시, 신비평의 지도자인 랜섬(J. C. Ransom)의 분류에 따르면 ´관념시(platonic poetry)´가 이 유형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즉물형은 관념형과 반대으로 이성적 인식을 통해 발견한 물질적 외관(外觀)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 상으로는 이미지즘, 신비평의 분류에 따르면 즉물시(physical poetry)가 이 유형에 해당합니다.

또 무의식형은 이성적 통제를 풀 때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무의식적 심상들을 받아쓰기 하듯이 자동 기술(automatism)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상으로는 초현실주의 시가 이에 해당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1930년대 이상(李箱), 1940년대의 <후반기(後半期)> 동인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호적 상징(signal symbol)은 대상의 의미나 모습을 배제하고, 추상적인 논리에 의하여 재편성한 것에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입체주의(Cubism)·미래주의(Futurism)·다다이즘(Dadaism) 시인들이 실험적으로 쓴 ´구체시(concrete poem)´, ´음향시(poem sonora)´, ´꼴라주(collage)와 몽타쥬(montage)의 시´, ´추상시(abstract poem)´, ´침묵시(dumb poem)´에서 발견되는 초점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상(李箱)의 일부 작품을 꼽을 수 있습니다. 자아 그럼 질문합니다. 준비하세요. 뿅뿅뿅

▣당신은 어느 지향성의 화제를 즐겨 택하십니까?
그야 두말할 것 없이 <화자 지향형>이라고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나라 시인 가운데 90%가 이 유형을 택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지향형을 채택하면, 표현의 기능이 강화되고, 독자로부터 공감을 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로, 시의 화제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화자 지향형을 택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이야기가 되고,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우아하고 고상하고 진지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여 그런 제재들만 고르기 때문입니다.
이 유형을 택하되, 김동리의 [등신불]이나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허구적 화자를 등장시키면 어떠냐구요? 네에, 그러면 좀 낫겠지요. 하지만,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독자들은 여전히 <시인=화자>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겁니다.
또 하나 약점은 감정이 고조되어 구조적으로 허약해지고, 감상(感傷)에 떨어지기 쉽다는 점입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앞부분

이 작품의 화제는 예전엔 내가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줄 몰랐다는 후회와 그로 인해 복바쳐 오르는 슬픔입니다. 따라서, 자기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하기 위한 화자 지향형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느낌은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을 받거나 과거에 대한 회상 또는 미래에 대해 전망할 때 발생합니다. 그로 인해 현재의 자극을 대상으로 삼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거나 <미래의 나>를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구조를 취하게 됩니다. 이때 현재의 나는 <서술 화자(state persona)>, 과거나 미래의 나는 <초점 화자(focalized persona)>가 됩니다. 그리고, 현재보다 과거나 미래가 더 이상적으로 그려지면서, 회고적(回顧的) 영탄적(詠嘆的)·감상적(感傷的) 어조를 띠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작품에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반복적인 구절이 그런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반복은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무의식에서는 그쪽으로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황이 변했음을 인정하면서 고착적(固着的) 정서를 보이는 걸 감상주의(sentimentalism)라고 한다면, 이 유형은 근본적으로 감상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 <청자 지향형>은 어떠냐고요? 청자 지향형은 <너>에 대한 이야기로서, <너는 이렇게 했느냐?>라든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의문 명령 애원 요청 호소의 성격을 띠는 화제를 말합니다. 구조상으로는 <나는 너를 이렇게 생각한다>와 <너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로 나눠집니다.

이런 화제는 화자 지향형보다도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화제로 제한된다는 단점을 지닙니다. 남에 대한 판단이나 요구는 객관적이고 윤리이며 관습적인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결 강렬하고도 단순한 어조를 택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강렬한 어조로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연시(戀詩), 조시(弔詩)나 축시(祝詩), 정치시(政治詩)를 제외하고는 이런 지향형을 택하는 작품이 드문 것도 바로 이런 단점 때문입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에서

이 작품의 의미는 <껍데기는 부도덕하다>와 <그러므로 껍데기인 너는 물러가라>로 나눠집니다. 그리고 그 ´껍데기´는 거짓된 인간들이거나 그들이 만들어 낸 제도(制度)와 같은 불특정한 것들로서, 화자가 청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청자 지향형은 청자와의 관계에 따라 화자의 어조와 태도가 달라집니다. 화자가 상위(上位)에 설 때에는 직설적인 어법과 강압적 자세를 취합니다. 앞의 작품이 강압적이면서도 명령적인 어법을 택한 것은 화자가 청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서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위(下位)에 설 때에는 아이러니를 비롯하여 역설 같은 완곡(婉曲) 어법을 택하고, 직설적인 어법을 택할 때도 간절하게 청원하는 형식과 화려하고 수식적인 문체를 택합니다. 그리고 아예 신처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일 때에는 기도·찬송·애원의 태도를 취합니다. 그것은 가급적 청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화자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채택하기 시작한 유형은 <화제 지향형>입니다. 이 유형은 청자(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판단은 청자가 내리도록 하는 형식으로서, <내가 본 그 사람(그것)은 이렇다>라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문맥의 표면에서 화자와 청자가 잠재되고, 정서적 표현과 의미 부여를 억제한 채 카메라로 사물을 포착하듯 이미지화합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햇살은 모두
둑 밑에 내려와 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강 바람이
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시골 청년
자전거 바퀴 살에
햇살이 실려서
돌아간다

그 바퀴 살 사이로
투명한


얼마쯤 걸었을까
미루나무도 가고 있는지……
미루나무는 조금씩 작아져 갔다
- 한성기(韓性祺), [둑길.1]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걷고 있는 둑길에 대해 어떤 의미나 정서도 부여하지 않은 채 걷고 있다는 사실과 둑길을 풍경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풍경들이 화자의 시선을 거쳐 들어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잠재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보가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띨 경우 신뢰를 잃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제 지향형이라고 해도 화자의 정서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이 어떤 화제를 선택하든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사실들은 은유적 형태로 제시됩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자는 ´청년´과 ´강´과 ´미루나무´를 뒤에 두고 한없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노년의 쓸쓸한 감정을 은유하기 위한 객관적 상관물(相關物)에 해당합니다.

<극적 지향형>은 1인칭 지향형의 정서와 의미 부여 기능, 2인칭 지향형의 상대에 대한 요구와 명령 기능, 3인칭 지향형의 객관적 자세와 이미지화 기능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 작중 상황이 연극처럼 환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칫하면 너무 길어지고, 산문으로 떨어지기 쉽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거리에서 우연히 아내를 만난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아내는 등 뒤에서
[여보, 여보!]하고 쫓아온다.
그래도 나는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

저녁 상을 가운데 놓고 아내와 마주 앉았다.
갑자기 서베이어 1호처럼
난데없이 사뿐히 착륙하는 얼굴.
[바로 저 얼굴입니다!]
[뭐가 저 얼굴이예요?]
[아니, 서베이어 1호의 달 연착(軟着) 말이야]

이제는
신비의 베일도 벗겨지고
대재벌(大財閥)의 몰락처럼 쓸쓸한 얼굴
달.
- 김윤성(金潤成), [아내의 얼굴]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아내를 만났는데, 모르는 척하고 그냥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여보, 여보!´ 부르며 뒤따라오자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 독백합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무심코 아내의 얼굴이 ´서베이어 1호´의 착륙으로 인하여 신비를 잃은 달 같다했다가 아내가 묻자 인공 위성 이야기라고 둘러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화자(나)-화제(아내의 얼굴 또는 달)-청자(아내)>의 삼자 관계를 고루 지향하는 극적 지향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앞에서 인용한 어떤 작품보다 한결 깁니다. 그리고,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라는 관계와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 <인간의 발이 닿은 달=대재벌의 몰락=신비를 잃은 아내>라는 은유의 축이 없으면 산문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종래의 시에서 극적 지향형을 택한 작품이 드문 것도 이런 약점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만 극복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 또 하나 질문을 해볼까요? 당신의 시가 현대적인가 여부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니 잘 판단하고 대답하십시오. 준비하시고, 쏩니다. 쾅!

▣당신은 선택한 화제의 어디에 초점을 맞춰 써오셨습니까
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장르´이니, 당연히 의미나 정서를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춰 써왔다고요? 그렇다면 그 정서와 사상은 당신만이 발견한 것이었나요?

그렇지는 않다구요? 그렇겠지요. 과학에는 새로운 발견이 있지만, 사상이나 감정은 새로운 게 없는 법이니까요. 가령, 사랑에 대한 감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구애나 결혼의 풍습은 시대와 민족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아득한 옛날의 원시인도 아프리카 오지의 깜둥이 처녀도 우리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귓볼이 빨개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가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박애(博愛), 공자님의 인의예지(仁義禮智) 사상은 그분들이 처음 주장한 게 아닙니다. 그분들은 인간의 보편적 심성 밑에 깔려 있는 사상을 체계화하고 실천한 분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이나 정서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은 대부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늘어놓는 결과가 되기 쉽고, 그 전달하는 데 신경을 쏟다보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물질적 속성을 상실하고 앙상한 관념의 덩어리가 되어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기 일수입니다. 우리 시단에서 상당한 시인으로 평가해온 김종삼(金宗三)의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으면서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金宗三),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전문

이 작품의 지향성은 화제 지향형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의 물질적 외관(外觀)을 강조하기에 적합한 화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란 순수한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관념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무교동´도 ´서울역´도 ´빈대떡´을 먹고 있는 목로 주점의 풍경도 사라지고 완전한 산문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초점이 관념 쪽에 맞추어지면,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정서가 강화되고, 명상의 흔적이 뚜렷이 부각됩니다. 반면에 시적 사물들은 특정감(特定感)을 상실한 채 물명(物名) 상태로 떨어지고, 정서 과잉에 빠지게 됩니다. 낭만주의 시가 흄(T. E. Hulme)이나 파운드(E. Pound)를 비롯한 이미지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난 것도 이런 약점 때문입니다.

그럼, 관념형의 반대인 즉물형(卽物形)은 어떠냐구요? 이 유형은 관념형보다 한결 구체적이고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예사조상으로도 관념형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초점일 뿐만 아니라, 현대 독자들은 시인으로부터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그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게된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텅 빈 그림(meaningless picture)´으로 떨어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같이
재재발렸다.
- 정지용(鄭芝溶), [바다·2]에서

이 작품은 봄날 얕은 여울목에서 자잘하게 부서지는 바다 물살의 모습만 제시되었을 뿐, 시인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사색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도대체 무얼 이야기하려고 하는가를 생각하고, 그러다가 별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는 참 깔끔하게 그렸다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흄과 함께 이미지즘 운동에 앞장섰던 파운드(E. Pound)가 그 대열에서 이탈해 ´은유하는 그림(picture of metaphor)´을 추구고, 그의 제자격인 엘리어트(T. S. Eliot)가 사상과 감정이 융합된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 이론을 내세우며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 운동에 앞장선 것도 이 초점이 지닌 한계 때문입니다.

무의식에 초점을 맞추면 이제까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접할 수 없는 풍경을 끌어들여 개별성(個別性)을 확보기에 용이해집니다. 그리고 고정 관념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을 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그림으로 이어져 사실감(reality)을 획득하기 어렵고,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을 들어내어 문학이란 이름으로 부도덕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다음 <후반기(後半期) 동인> 중 한 사람인 조향(趙鄕)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열 오른 눈초리, 한잔한 입 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히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처럼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이얗게 화석(化石)이 되어 갔다.
- 조향, [EPISODE] 전문

이 작품은 우리의 경험에 비춰볼 때 너무 낯설어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프로이트(S. Freud)나 융(C. G. Jung)과 같은 무의식을 연구한 사람들의 이론을 빌어 해석합니다.

그들의 이론을 따를 경우, ´총´은 남성 성기, ´구멍´은 여성 성기, ´바다´는 ´모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열오른 소년´이 성기로 소녀를 겨누고, 섹스가 끝난 다음 소녀는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바라보면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주장했듯이 자동 기술법으로 쓰여l진다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을 자동 표출시켜 문자 언어로 기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에서 언뜻언뜻 떠오르는 무의식적 심상들을 몽타쥬한 것이거나, 세속적 논리와 가치관을 배제하고 자유 연상(自由聯想)한 결과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호적 상징형은 뒤짚힌 숫자들을 나열한 이상의 [오감도(烏敢圖) : 시 제4호] 같은 작품에 나타나는 초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처럼 언어로 쓴 것도 기호적 상징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소녀는 지평선을 가볍게 허리에 두르고 외출을 한다.
2. 탐정이 찾아와 가족들의 충치에 대하여 상세히 노트 한다.
3. 수음(手淫) 상습범인 하녀가 앵무새에게 말을 도둑맞고 실어증이 된다.

그것은
책을 읽는 고양이 때문이다.
그릇 찬장 속에서
역사가 눈을 뜬다

4. 말더듬이 집사가
에스키얼그 요리에 대하여 부친과 논의를 하고 있다는
추론
5. 그 방정식은
엄지손가락 + 우유x =서양사 개론
- 테레야마 슈누시(寺山修可), [물 속의 소녀]에서

이 작품은 얼핏 보면 무의식적 심상을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좀더 살펴보면 기호적 상징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향의 작품에서 소녀가 총구를 막았는데도 쓰고, 손이 구멍 뚫렸는데도 그 구멍을 통해 바다를 내다본다는 것은 현실의 논리에 비춰 볼 때 이상스러운 일이지만, 실제로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티프와 모티프의 연결이 비일상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모티프의 연결만 비일상적인 게 아닙니다. 각 연에 번호를 붙였지만 필연적 계기성을 발견할 수 없고, 암호적인 부분이 너무 자주 눈에 뜨입니다. 우선 ´소녀는 지평선을 가볍게 허리에 두르고 외출을 한다´라는 첫머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다 더듬어도 ´지평선´을 허리띠처럼 두르고 외출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우유x=서양사 개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엄지 손가락´에 얼마간(x)의 ´우유´를 더하면 ´서양사 개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녀´, ´지평선´, ´탐정´, ´가족들의 충치´ 등은 시인이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추론을 하여 치환한 기호적 상징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누구의 시에서나 사용하는 은유(metaphor)도 기호적 상징으로 바뀌는 중간 단계의 어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여인=꽃>으로 바꾸었다고 합시다. 이 은유는 <여인>과 <꽃>의 <유사성(similarity)>과 <차이성(difference)> 가운데, 차이성은 제거하고 유사성만 택한 것으로서, 이를 배제했다는 것은 여인의 본질 가운데 절반 이상을 제거하고 추상화했음을 의미합니다. 오르테가(Y. G. Ortega)가 은유를 다른 사물로 바꿔 보려는 지적(知的) 행위로서, 현실로부터 도피하면서 비인간화하려는 본능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따라서, 은유와 기호적 상징의 차이는 보조관념에 원관념을 추론할 수 있는 고리를 남겼느냐 차이로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호적 상징에 초점을 맞추면 전통적인 시에서 얻을 수 없는 새로움과 시적 긴장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논리적 전환의 고리가 생략되어 그 작품이 채택한 상징 체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전달이 차단됩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시인들이 이런 초점을 기피해 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유형도 문제가 있고 저 유형도 문제가 있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이상적이냐구요? 안 돼요. 제가 질문하려는 걸 대신 하시네요. 자아, 받으세요. 쾅, 쾅, 쾅! 왜, 이번에는 한번만 ´쾅´하지 않고 세 번씩이나 ´쾅쾅쾅´이냐구요? 제 역할을 침범하려고 했으니까요.

▣이제까지 당신은 자신의 작품 속에 몇 개의 초점을 담아왔습니까?
한 개의 초점을 담지 몇 개의 초점을 담느냐구요? 그렇다면, 당신의 시는 결코 새로운 게 아닙니다. 특히, 관념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낡은 시´라고 비판을 받아도 불평하지 마십시오.

이번만은 동의할 수 없다구요? 그럼, 당신이 고를 때, 어떤 사람이 최고로 꼽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지만, 얼굴도 이쁘고, 마음씨도 착하고, 교양도 있고, 능력도 있고, 나도 잘 이해해주는, 그런 사람을 꿈꾸지 않았나요?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미도 풍부하고, 작중 풍경도 눈에 선하게 보이고, 의식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적 욕망도 충족시켜줄 수 있고, 객관적인 논리도 지닌 작품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소개한 신비평가들도 인간 정신을 <이성>과 <감성>으로 나누고, 이들을 모두 포괄한 <형이상시>를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신비평가들의 분류에는 무의식과 기호적 상징이 빠져 있습니다. 무의식은 부도덕하고, 기호적 상징은 문학 작품에서 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문학사 속에서 실제로 채택된 초점이므로, 관념형을 C, 물질형을 P, 무의식형을 U, 기호적 상징형을 S로 표현하고 이들을 포함하여 분류할 경우, 신비평에서 설정한 초점의 유형은 관념(C)와 즉물(P) 그리고 복합형인 형이상시(CP) 3개에 불과하지만, 다음과 같이 15개로 늘어납니다.

○기본형 : 관념시(C), 즉물시(P), 무의식의 시(U) 기호적 상징의 시(S)
○1차 결합형 : CP(형이상시), CU, CS, PU, PS, US
○2차 결합형 : CPU, CPS, CUS, PUS
○3차 결합형 : CPUS


이들을 다시 화제의 지향성과 결합시키면 기본형만도 16가지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초점은 라고 해도 모두 균등하게 배분될 수 없으므로 주된 것을 대문자로 부차적인 것을 소문자로 표시하면서 , , , , , , , , 처럼 연속 상태를 이뤄 하나의 구(球)처럼 무수한 유형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인이 같은 내용의 화제를 택해도 매번 다른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자아, 그럼 복합 초점이 독자의 전인적 인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다음 작품을 살펴보면서 확인해볼까요? 이번 호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들을 많이 골랐으니, 비교하기 좋게 역시 바다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을 소개해보겠습니다.

①늦가을 햇살이 스적스적 떨어지는 바닷가 언덕
지난 여름 붉게 타던 칸나가 대궁 채 무너져 내린다.
나는 완벽한 그 추락의 자세에서 불같이 날카로웠던 네 입술을 떠올리려 애쓴다만,
나른한 미열과 슬픔에 떨며 너를 산이나 이별이라고 부르려 애쓴다만,
오, 칸나여. 늦가을 바다로 대궁 채 썩어 떨어지는 칸나여!이제 바다는 바다, 산을 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구나.
②캉캉 춤을 추던 파도는 …… 그날 그 찻집 그 의자 …… 조랑말떼처럼 갈기를 휘날리며 …… 다시 그 음악 소리가 …… 물이랑을 박차고 내달리며 …… 부우 부우 부우 …… 푸른 갈기에 실려 올라가던 수평선은 ……섹스폰 낮은 가락이 불안하게 꺾일 때마다 …… 떨어지는데 …… 구두 앞부리로 마루바닥을 탁탁 구르고…….
③이제 바다를 바다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차가운 바다로 천천히 추락하는 기억의 칸나여!
난 네 희고 긴 손가락 끝을 잡고 어두운 층계를 다시 내려가려 한다만,
그 층계 아래 타오르던 불빛이 붉었던가 노랬던가 희미한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 뿐,
언듯언듯 기어들던 빗소리가 네 겨드랑이 밑에서 새소리처럼 부서지던 것밖엔 기억할 수 없어 자꾸 발을 헛디딘다.
④칸나여, 시들은 햇살 속 반짝이며 떨어지는 기억의 칸나여.
완벽한 네 추락의 자세가 너무 슬퍼 나는 수평선을 타고 하늘로 오른다.
-필자, [다시 칸나가 핀 언덕에 와서] 전문

좀 긴가요? 여러 초점을 포괄하다보면 길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이 작품의 첫머리는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모습´의 칸나꽃과 그에 대한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바닷가 언덕´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냥 바닷가 언덕이 아니라 ´늦가을 언덕´이고, 그것도 햇살이 생기를 잃고 ´스적스적´ 떨어지는 언덕입니다. 그리고, 꽃잎도 그냥 지는 게 아니라 ´대궁 채 썩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상의 모습을 그리고, 의미와 정서를 부여해나가면서 점점 감정을 고조시키다가 ②로 접어들면 사랑하던 여인과 만났던 추억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③으로 접어들면 무의식적 환상에 빠져들고, ④에서는 차츰 정신을 가듬으면서 의식의 상태로 되돌아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기호적 상징만 빠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복합 초점을 취하면 정지용의 [바다·2]에서 제거되었던 의미와 정서, 조향의 [EPISODE]에서 제거되었던 사실감을 부여하기가 용이해집니다.

제 작품이라서 계속 설명을 하자니 쑥스럽네요. 그만 설명하고, 마지막 질문을 한 다음 이번 호는 마칠까 합니다. 쏩니다, 받으세요.

▣시의 화제는 어느 방향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하자면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시문학사(詩文學史)를 면밀하게 살펴봐야 하는데, 학자가 아닌 우리에게 너무 복잡한 질문을 하는 게 아니냐구요? 그래도 생각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사의 방향을 가늠해보지 않으면 언제나 뒷북만 치게 되니까요.

제 생각으로는 지향성은 <청자 지향형→화자 지향형→화제 지향형>의 순으로 변천해 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청자 지향형>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시의 기원을 신이나 전쟁에 출전하는 용사들을 위해 쓰여졌다는 히른(Y. Hirn)과 그로세(E. Grosse) 같은 사람들의 사회학적 기원설(起源說)을 미뤄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생존 자체가 어려운 시대에는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바치기 위해 썼다는 이야기가 훨씬 타당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청자 지향형>에서 출발한 시가 <화자 지향형>을 거쳐 <화제 지향형>으로 바뀐 것은 어느 정도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뒤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생김에 따라 자기 정서를 표출하기 위한 화자 지향형이 탄생되었고, 객관적 정보가 팽창됨에 따라 화제 지향형이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점의 이동 방향은 로 바뀌어 온 게 아닌가 합니니다. 그러니까 <관념형>에서 출발하여 물질적 초점이 첨가되고, 그 다음 단계에서 관념을 배제한 <즉물형>가 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무의식형>과 <기호적 상징형>이 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관념형>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시의 효용성(效用性)과, ´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초점에 즉물성이 첨가되기 시작한 것은, 자기 사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이며, 그 다음 단계에 순수한 즉물형이 등장한 것은 관념적 인식에 대한 반동으로써 시인의 판단을 보류하고 독자로 하여금 제시된 풍경을 통하여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무의식형이나 기호적 상징형의 출현도 의식 세계만을 다루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형이 먼저 탄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술이란 근본적으로 자아의 표현이며,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래시에는 어떤 화제가 주류를 이룰까요? 그것은 아마도 이제까지 문학이 점점 미시주의(微視主義) 쪽으로 흘러왔음을 염두에 둘 때, 다음 시대의 통합주의(統合主義)로 방향을 돌리고, 화제 역시 <극적 지향성 -CPUS 초점>의 결합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현대시에 점점 산문성이 증가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유형 역시 앞에서 말한 약점을 지니고 있으니, 그를 조심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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