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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문단·문인 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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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창작에 도움이 되십시오-8
작성자 곽병희
댓글 0건 조회 2,894회 작성일 2005-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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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배경 만들기


안녕하세요? 오늘은 창 밖에 여름내 막아섰던 열기의 한쪽 모서리가 쫘악 갈라지면서 서늘한 기운이 폭포처럼 쏟아지네요. 가을이 오는가봐요.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드네요.

하지만 감상일랑 접고 다시 시 쓰기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지난 호까지는 시의 유형에 대해 말씀 드렸지요. 이번 호부터는 실제로 시쓰기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품을 쓸 때, <상황(situation)>과 <배경(setting)>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안습니다. 중심이 되는 이야기만 잘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를 쓰든 산문을 쓰든 상황과 배경부터 설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상황과 배경은 존재체(存在體)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독자들은 그를 따라 작품 속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작품의 성공과 실패는 인물이나 테마에 의해 결정된다기보다는 그에 얼마나 알맞은 배경과 상황을 설정해 주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컨대, [외디프스] 신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과 콤플렉스를 다룬 것이라고 하지만, ´살부혼모(殺父婚母)´라니,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운명을 미리 설계한 신을 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뿐, 신화 속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배경과 상황을 타당하게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를 죽인 것은 어려서 버림을 받아 아버지인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결혼한 것은 애욕 때문이 아니라, 남편을 잃은 여왕으로서는 여왕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스핑크스를 퇴치해야 하고, 그래서 누구든지 스핑크스를 물리치면 결혼하여 나라를 주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고, 그 퇴치자가 바로 자기 아들이 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작품을 쓸 때 소홀히 취급하는 탓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어의 개념도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 드리면, 배경은 작중 인물이 등장하는 무대를 말합니다. 물리적(物理的)이고, 고정적(固定的)이며, 중립적(中立的)인 성격을 띄고,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으로 나눠집니다. 그리고, 상황은 작중 인물이 처한 <처지>를 말합니다. 인격적(人格的), 가변적(可變的), 유동적(流動的)인 성격을 띄며, <인적>·<사회적>·<문화적>·<역사적> 상황으로 나눠집니다.

이런 차이로 인해, 서정에서는 배경을, 서사와 극에서는 상황을 중시합니다. 그것은 서정의 화제가 현재 이 순간으로 제한되고, 서사나 극의 화제는 시간과 공간의 이동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배경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작품 속의 배경은 필연적이고 의도적이며 심리적이어야 한다.

작품을 쓸 때 흔히 배경의 설정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시적 대상이 존재했던 시공을 그대로 모방하면 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입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가 실제 시인이 아니듯, 배경 역시 시적 대상이 존재했던 실제 시공이 아니라 화자와 화제에 맞추어 재편성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차이를 지니는 천만에 말씀이냐구요? 실제 배경은 <우연적>이며, <비의도적>이고, <물리적>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책상 위의 풍경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이리톨 껌통 옆에 전화기가 있고, 그 옆에 제가 발행하는 계간문예지 <다층>이 있고, 노트북 왼쪽에는 육각수 물병이 있고, 다시 그 옆에는 이 원고를 출력한 초고와 대낮인데도 켜 져있는 스탠드와 스태플러와 지갑 등이 놓여져 있습니다.

아니, 이 정도가 아닙니다. 출력한 초고를 올려놓은 독서대 위에는 엠이(M.E, marriage encounter)를 갔을 때 사온 열쇠 고리가 있고, 그 뒤에는 안경집과 백악관이라는 술집의 개스라이터와 디멘탑이라는 설사 식체 토사 약 6개 캡슐과 지난 해 역사교과서 파동 때 일본인인 호사카 교수가 MBC에 출연해 왜 일본은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하는가를 밝힌 걸 녹화해 보내준 테이프와…. 일일이 열거하자면 이 페이지를 다 채워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우연히 그렇게 놓여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글로 쓸 때는 아주 다릅니다. 가령, ´책상 위는 지저분했다.´라고 쓰거나, 몇 가지만 열거했다고 합시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들은 다른 것과 관계를 맺으면서 무언가 의미해야 합니다. 디멘탑을 이야기했으면 배탈이 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자이리톨 껌통을 이야기했으면 담배를 끊기 위해 줄곧 껌을 씹는다는 식으로 연결을 지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 지금 배탈이 나지 않았거든요. 또 아주 단순하게 ´책상 위는 매우 지저분했다´라고 써도 며칠 째 원고를 쓰느라고 치울 틈이 없었다든지,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지저분한 사람이라며 무엇인가 의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텍스트 속의 배경은 <필연적>이고 <의도적>이며 <심리적>이어야 합니다.

또, 실제 배경은 <등장적(等張的)>이고 <연속적>이며 <중립적>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 길이입니다. 그리고 이 끈끈한 날씨는 저만 괴롭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괴롭힙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의미 없는 것들은 여지없이 생략하고, 의미있는 것들은 단 1분의간 등장해도 몇 페이지로 확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비등장적>이고, <단속적(斷續的)>입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과 공간도 누구에게는 유리하고 불리하게 작용하므로 <가세적>입니다. 따라서, 실제 배경은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텍스트 속의 배경은 <심리적 법칙>과 <미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작품 속에서 제 역할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기능적 배경(functional setting)>과 <중성적 배경(neutral setting)>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능적 배경은 화자의 심리 상태를 은유하고, 그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조장하거나 억제하며,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다음 작품의 배경은 기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밤비가 내리네
어둠을 흔들며 조용히 내리네

그리움이 늘어선 언덕에
마른 수수잎 소리가 들리네

아련한 파도 소리
고향집 울타리에 철석이는데

낮닭 우는 소리도
가슴에 차오르네.
- 차한수(車漢洙), [손·47 : 고향]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상상적으로 귀향(歸鄕)하고 있습니다. 조용조용 내리는 밤비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촉발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둠´이 화자를 감상적으로 만들고, ´밤비´가 부채질한 데 원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이 기능적이라는 것은 다른 것으로 바꿔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쾌청한 날의 대낮이나 폭풍우 치는 밤으로 바꿨다고 합시다. 아마 전자로 바꾸면 독자들은 화자를 참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일 할 시간에 고향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후자로 바꾸면 조용조용 내리는 밤비를 맞으며 화자를 따라나서던 독자들은 ´어휴 별나라, 당신이나 가´하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 겁니다. 궂은 날씨에는 누구나 꼼짝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중성적 배경은 단지 작중 인물의 등장 무대 구실만 하는 걸 말합니다. 고전문학에서는 모두 이런 배경을 택하고, 현대문학으로 접어들면서 기능적 배경이 채택됩니다. 하지만 시의 경우 아직도 상당수의 시인들이 중성적 배경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사(詩史)에서 가장 빛나는 시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김소월(金素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1-2연

이 작품의 배경은 언뜻 보면 기능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화자가 등장하는 시공을 진달래꽃이 활짝 핀 약산 밑으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특정한 순간의 특정한 배경´을 채택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달래꽃´과 ´약산´은 이 작품의 테마인 이별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것은 화자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꽃을 뿌리면 어떨까 하는데 미쳤고, 그러다가 그냥 약산의 진달래꽃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산 진달래꽃이 아니라 바닷가에 피어있는 개망초 꽃도 상관없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배경은 중성적 배경에 속합니다.

이와 같이 중성적 배경을 채택하면 배경은 그냥 배경으로 떨어지고 시인의 말만 전달됩니다. 그로 인해, 못마땅한 테마일 경우에는 독자들은 그 작품을 거부합니다. 특히, 현대시 같이 사적이며,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주제는 거부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독창적인 인물과 테마를 제시하려는 사람은 우선 기능적인 배경을 설정하는 방법부터 터득해야 합니다.

배경의 유형과 배경소의 기능

기능적인 배경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경의 유형과 배경소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우선, 배경의 유형을 살펴보면 <신화적>·<사실적>·<심리적>·<창조적> 배경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화적 배경은 이 세상을 <천상>·<지상>·<지하계>로 나누고 서로 이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계관을 대변합니다. 그로 인해 사물도 사람처럼 말을 걸고 작중 인물을 돕거나 방해합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동화나 신비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적합합니다. 그러나, 물활론(物活論)을 믿지 않는 현대인들에게는 자칫하면 유치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성인들을 독자로 삼는 작품에서 의인법을 자주 쓰는 작품이 어쩐지 유치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실적 배경은 현실의 세계를 모방적으로 그린 걸 말합니다. 그러나, 대상이 존재했던 순간의 무대를 그대로 그리는 게 아닙니다. 실제 세계를 기초로 하되, 화자의 정서나 화제를 부각시키는 데 도움되지 않는 것들은 제거하거나 변형시킵니다. 그러므로 사실적인 배경이냐 여부는 모방의 원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도록 그렸느냐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물 속을 들여다 보면 방패연 하나
늙은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다

´아버지´하고 부르면
메아리 대신 솟아오르는 달

고향 하늘 물이 넘쳐
팔월 보름달이 잠긴다.
- 이무원(李茂原), [수몰지구(水沒地區)]에서

이 작품에서 화자는 고향의 댐 속에 잠긴 ´늙은 소나무´와 ´방패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부르면 메아리 대신 ´보름달´이 떠오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소나무에 걸려 댐 속에 잠긴 방패연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화자가 부른다고 달이 떠오를 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배경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심정을 강조하기 위해 어릴 적의 체험을 부분적으로 재조정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실적 배경을 택하면 작중 상황을 쉽게 짐작하고,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기가 용이합니다. 하지만 기억의 고집 때문에 불필요한 것들이 끼어들기 쉬우며, 자칫하면 중성적(中性的)이거나 장식적(裝飾的)인 배경(decorative setting)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화자와 화제에 맞추어 재조정하면서, 시적 대상이 존재하던 시공 가운데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모습´이었던 것만 골라 그려줘야 합니다.

심리적 배경은 우리의 의식 속에 드려진 심리적 풍경을 모방적으로 그리는 걸 말합니다. 그로 인해 이 유형은 은유적인 성격을 띄게 됩니다. 그리고 배경 그 자체가 시적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다음 작품의 배경은 심리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서, 배경 그 자체를 시적 대상으로 삼은 예에 해당합니다.

녹색 페어그라스 저편에서
드뷔시가 가을 나무 그늘에 쉬고 있다
떠오르다 머물어 있는
시간은
흐를수록 희미해지고

오래 바라본다
베일에 싸인 종소리들의 흔적이
그대 목덜미께를 쓰다듬는 것을
누가 융단 솔로 유리를 닦아낸다
- 조창환, [연가풍으로.2] 전문

이 시인이 직접 현실에서 드뷔시를 만났을 리는 없습니다. 아마 드뷔시의 음악을 듣는 동안에 떠오른 무의식적 환상을 그린 것일 겝니다.

이와 같이 심리적 배경을 설정하면 그를 중심으로 텍스트의 각 요소들이 연결되어 유기성이 강화됩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모습과 달라지기 때문에 시적 긴장이 높아지고 기능적 배경이 됩니다. 반면에, 난해시(難解詩)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제입니다.

창조적 배경은 모방의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게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하나님처럼 언어에 남아 있는 사물성(事物性)을 이용하여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이런 유형으로는 김춘수(金春洙)의 ´무의미시(無意味詩)´나, 이승훈(李昇薰)의 ´비대상시(非對象詩)´의 배경을 꼽을 수 있습니다.

벽(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
회랑(回廊)의 벽에 걸린 청동 시계(靑銅時計)가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 [처용단장] 제1부 3

이 작품에서 ´벽´과 ´홰나무´가 걸어오는 것만 주목하면 신화적 배경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화적 배경은 배경소끼리 인과관계를 맺으면서 인격화되는 반면에, 창조적 배경은 인과관계를 맺지 않으며 현실과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와 같이 창조적 배경을 채택하면 시 속의 풍경이 전혀 새로워집니다. 그러나, 의미를 중시하는 독자에게는 말장난처럼 보이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거나 풍경소끼리 인과관계를 설정해주면 심리적이거나 사실적인 배경으로 바뀌면서 새로움이 사라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배경소 가운데 우선 시간소들을 의미를 살펴보면, 봄과 가을은 여성성(anima)을, 여름과 겨울은 남성성(animus)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좀더 세분하면, 여성성을 강화하는 봄은 순진·화려·화사함을, 가을은 성숙·고뇌·우울을, 남성성을 강화하는 여름은 성장·기쁨·정열을, 겨울은 정지·좌절·절망·엄숙함을 강화합니다. 그리고 일생과 연관지으면 봄은 유년에서 사춘기까지, 여름은 청·장년기, 가을은 노년기, 겨울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진달래꽃]에서 시간적 배경을 봄으로 잡은 것은 아주 잘 설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화사한 봄날에 이별이라는 테마를 연결시켰기 때문에 더욱 애초롭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 봄이 화자를 어린 처녀라는 쪽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에 말없이 고이 보내는 게 정당화된 것입니다.

하루의 주기 가운데 <빛의 시간>인 낮은 남성성이 강화하고, <어둠의 시간>인 밤은 여성성이 강화합니다. 그리고,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황혼녘은 여성화의 기점 노릇을 하고, 새벽녘은 남성화의 기점 노릇을 합니다.
하지만, 작품 속에 배경은 현실의 것만은 채택되는 게 아닙니다. <진리>·<도>·<윤리> 같은 공적이면서도 도덕적인 화제는 어떤 조건이 이뤄지는 <가정의 시공>을 택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와 같은 가정의 시공을 택하면 아무리 격정적인 화제라고 해도 화자는 균형과 절제의 태도를 잃지 않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진달래꽃]에서 그토록 사랑하는 님이 떠나겠다는 데도 꽃을 뿌리겠다고 하는 것은 현실의 사건이 아니라 가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공간의 유형은 <닫힌 공간>, <열린 공간>, <경계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열린 공간은 남성화, 닫힌 공간은 여성화를 강화시킵니다. 다음 작품은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가장 남성적이라는 이육사(李陸史)의 것들입니다. 그런데, 공간의 유형에 따라 성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중략)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맘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황혼]에서

ⓐ의 화자는 자기 노래를 묻어두었다가 ´천고´ 뒤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에게 ´목놓아 부르게´ 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성 중에 가장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적 배경은 겨울로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지간한 시련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은 광야로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초인적이면서도 활달한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반면에, ⓑ의 화자는 아주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성화된 남성화자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은 여성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있것처럼 그려야합니다. 우리는 흔히 남자가 외로워할 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서히 감상적 정서가 발동하기 시작하는 황혼의 시간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화자의 위치를 ´황혼´녘의 ´골방´으로 설정한 겁니다.

이와 같은 배경소들이 화자의 성격이나 행동에 미치는 정도를 따져보면, 공간소보다는 시간소가 더 영향력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소 끼리는 계절보다 하루의 시간대가 더 크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공간보다는 시간이 바꾸기 어렵고, 같은 시간도 계절은 선택의 여지가 큰 반면에 하루의 주기는 여지가 적기 때문입니다.

화자와 화제에 맞춰 시간소와 공간소를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작품을 쓸 때 화자나 화제에 딱 들어맞는 배경을 마련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예컨대 다음의 서정주(徐廷柱)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작품의 화제는 벌건 대낮의 성적 욕망입니다. 하지만 대낮으로 설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부담이 뒤따릅니다. 우선 남들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짓을 벌이기 어렵다는 생각을 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자칫하면 너무 외설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밤으로 설정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밤으로 설정할 경우, 사랑하는 사람과 쫓고 쫓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서, 시인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약화됩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배경은 그대로 유지하되 부분적으로 조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새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왼몸이 달어…
- 서정주, [대낮]에서

이 작품 대낮으로 설정할 경우 우선 보완해야 할 것은 정서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미당은 ´밤처럼 고요한´을 비롯하여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라든가, ´취해 나자빠진´ 같은 구절을 통해 어둠과 잠의 이미지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밤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보완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미당은 공간적 배경을 ´꽃밭 새이 길´로 정하고,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요한´이라는 이미지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아니, 미당의 치밀함은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개연성을 부여해도 화자에게 외설스럽다는 비난이 쏟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자를 보호하기 위해 아예 의식 상태가 정상이 아니며, 그런 걸 따질 신분도 아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핫슈를 먹어 취해 나자빠진´이라든가 ´능구렝이같은 등어릿길´이 바로 그를 암시하기 위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배경을 조절하는 방법으로는 <첨가>·<왜곡>·<전위(轉位)>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확대>와 <축소>를 추가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대>와 <축소>는 시각 예술에서 유효한 방법일 뿐, 문학이나 청각예술에서는 그다지 유용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자의 방법을 쓸 경우에는 좀더 자세히 묘사했거나 과장한 것처럼 보이고, 후자의 방법을 쓸 경우에는 독자들이 주목을 하지 않아 원하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첨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거나 부적절할 때 다른 요소들을 보태는 방법으로서, 앞에서 인용한 미당의 작품은 이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곡은 일상적인 풍경을 비틀어 화자의 심리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다음 작품이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시계는 열 두 점, 열 세 점, 열 네 점을 치더라.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엎드려 나는 이름을 부른다. 이름은 가혹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집이여. 손가락들이 고통을 견디는 집에서, 한밤의 경련 속에서, 금이 가는 애정 속에서 이름 부른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밤, 더욱 시린 밤은 참을 수는 없는 강가에서 배를 부르며 나는 일어나야 한다. 누우런 아침 해 몰려오는 집에서 나는 포복한다. 진득진득한 목소리로 이름 부른다. 펄럭이는 잿빛,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 경련하는 존재여, 너의 이름을 이제 내가 펄럭이게 한다.
-이승훈(李昇薰), [이름 부른다] 전문

일반적으로 벽시계는 열두 번 이상 울리지 않게 만들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열세 점, 열네 점´까지 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과 ´이름´이 종잇장처럼 휘날리는가 하면, ´밤´이 경련하면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배경은 화자의 의식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리기 위한 일상적 풍경을 왜곡한 것으로서, 화자의 등장 무대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심리 상태를 은유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위는 시간이나 공간 또는 어느 카테고리에서 다른 카테고리 쪽으로 옮겨 변형시키는 방법을 말합니다. 다음 작품은 이런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①나는 늑대라는 말을 좋아한다.
´늑대´가 아니라 ´느으윽대애´라는 말을 좋아한다.
②느으윽대애라는 말 속에는 눈을 하이얗게 흘기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 가슴 속에는 은빛 갈기를 세운 사내 하나가 살고 있다.
③나는 늑대란 말을 아주 좋아한다. 어두운 지하철 입구
또는 그늘진 빌딩 사이를 걷다가 문득 그 말을 떠올릴 때면
④´느으윽´하고 둥글게 휘어지는 혀 끝과 입천장 사이
아스라한 수묵빛 산등성이가 떠오르고
나는 한 마리 늑대가 되어 은빛 갈기를 세우며 화르르 떤다.
⑤나는 늑대란 말을 아주 좋아한다. ´느으윽´ 하고 잠시 멈추는 순간
⑥벼랑 끝, 달을 향한 내 울음은 계수나무 가지를 흔들고
이파리마다 가득 고인 달빛이 쏟아져 지상의 모든 것들을 달빛 투성이로 만든다.
-필자, [나는 ´늑으윽대애´란 말을 좋아한다]에서

이 작품에서 ②부터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공간이 아니라 언어 안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③에서 다시 현실적인 공간으로 이동하고, ④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공간을 결합시키고, ⑤에서는 또 현실로 빠져 나오고, ⑥에서는 다시 현실과 환상의 공간을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위치를 바꾸면 정상적인 관점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드러내는 구실을 합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감정을 싣지 않은 ´늑대´와 여성들이 자기 애인이나 남편에게 눈을 흘기며 하는 말인 ´느으윽대애´가 다르며, 여자들의 가슴 속에는 늑대 한 마리씩 살고, 거대한 도시 문명에 찌든 남자들은 누구나 그런 여인들을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늑대가 되고 싶어한다는 거 말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와 ´사내´, ´늑대´와 ´느으윽대애´의 두 세계를 그리기 위해 양쪽을 왔다갔다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이번 호 이야기를 끝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번 호에서 배경의 유형과 배경소들의 의미를 이야기한 부분과 세 번째 연재했던 [말하는 시쓰기의 절차와 방법]에서 두 번 째 항목인 ´화자와 화제에 어울리는 시간과 공간을 선택하라´와 일부 내용이 같다는 점입니다. 이론적인 글을 연재하다 보면 자꾸 이렇게 중복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찝찝해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럼, 끝낼래요. 안녕히 계세요. 흰눈이 풀풀 날리는 초겨울에 뵈어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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