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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문단·문인 동정

경남문단·문인 동정
시창작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4
작성자 곽병희
댓글 0건 조회 2,830회 작성일 2005-02-18

본문

'1. 말하려는 시 쓰기


앞에서 시를 쓸 때 일반적으로 유의할 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직접 작품 쓰는 요령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재가 확정되면 곧바로 쓰기 시작합니다. 마음 속에서 들끓는 시적 충동을 어서 작품으로 완성해보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두르면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가 시로 쓰려는 것들은 상반된 충동이 뒤섞인 복합 감정으로서, 목표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자기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작품으로 쓰려는 것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자기가 보고 겪은 것에 대한 느낌이나 상상한 것들을 <이야기하려는 유형>이고, 둘째로는 자기의 외부나 내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려는 유형>이고, 셋째로는 <무엇인가 창조해 보이려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앞에서 살펴본 초점과 연결시킬 경우, 말하려는 시는 <관념형(觀念形)>과 <기호적상징형(記號的象徵形)>, 그리려는 시는 <즉물형(卽物形)>과 <무의식형(無意識形)>으로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를 쓰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니 말하는 시 쓰기 요령부터 알아보기로 합시다.

1. 자신이 나설 것인가, 허구적 화자를 내세울 것인가.

우리는 흔히 문학작품을 <담화(discourse)>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시적 인물(poetic character)>이나 <화자(persona)>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인이 작품 속에 직접 등장하여 말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시 속의 인물=시인>인 <자전적(自傳的) 화자>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글쓰기에서 작가가 직접 등장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사실대로 쓰는 것으로 믿고 있는 일기(日記)만 해도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일기를 쓰면서 추가하기도 하고, 분명하게 그런 행동을 했어도 생략하면서 씁니다. 그러므로, 시의 세계는 시인이 선택한 테마에 따라 자기 태도를 결정하고(함축적 시인), 그에 적합한 인물(화자)을 내세워 작중 인물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엿보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만 해도 그렇습니다. 소월은 남자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 여자가 등장한 것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리겠다고 생각하고, 그런 사랑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에 여성화자와 그의 상대인 ´님´을 내세워 이야기를 주고 받도록 하고, 그걸 엿보게 만든 게 이 작품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도표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할까요?(다운을 받지 않으면 도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김소월을 여자처럼 매우 연약하고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억(金億)과 박종화(朴鍾和)의 증언에 의하면 매우 이지적이며, 키가 작고 얼굴이 까무잡잡하며, 장삿꾼 같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경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던 학교도 문학과 관계가 있는 문과(文科)가 아니라 조도전(早稻田) 대학 상과(商科)였다거나, 1925년 이후 시장 사람들에게 돈놀이를 하고, 대낮에도 술에 취해 돌아다녔다는 사실로 미루어도 이런 증언은 그리 틀린 게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에 대한 의식구조만은 매우 여성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여성적인 인간상이 함축적 화자로 바뀌고, 그런 함축적 화자가 허구적인 여성화자와 남성 청자를 내세웠으며, 그들끼리 이별의 노래를 주고받는 걸 엿볼 수 있도록 만든 게 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허구적인 화자를 내세우는 방식은 현대시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닙니다. 신라 향가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나 고려 가요인 [정과정곡(鄭瓜亭曲)]도 그런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이야기하려는 시를 쓰려면 그 화제에 적합한 화자를 선택하는 작업이 먼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화자의 유형을 분류하는 기준을 제시하면, ①시인과의 관계에 따라 ②화자의 신분(身分)에 따라, ③어법과 태도에 따라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시인과의 관계에 따라 나눌 경우에는 앞에서 말했듯이 <자전적 화자(自傳的話者)>와 <허구적 화자(虛構的話者)>로 나눕니다. 하지만 완전한 자전적 화자도 허구적 화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꾸며낸 인물이라고 해도 시인의 가치관과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아무리 자신을 내세우려 해도 부분적으로 꾸밀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과 화자의 관계는 유사관계(類似關係)로서 ´자전적´이냐 ´허구적´이냐는 실제 시인에 얼마나 닮았느냐 하는 정도 차이를 나타내는 용어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전적 성격이 강한 화자를 택하면 표현 기능이 강화됩니다. 그것은 작품을 쓰는 목적이 시인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시의 내용을 시인의 발언으로 해석하여, 허구적 화자를 택했을 때보다 한결 더 신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시적 변용을 거치지 않을 경우에는 산문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이라서 제재가 제한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멋있고 근사하며 공동선(公同善)을 주장하는 테마만 고르고, 사소하고 사적이며 부도덕한 화제를 피하기 쉽습니다. 또, 자기 이야기라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여 감상적인 시가 되기 쉽습니다. 현대시로 접어들면서 허구적 성격이 강한 화자를 채택하는 시인이 증가하는 것도 이런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대로 허구적 화자를 택하면 시인과 분리되어 화제의 선택이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극적으로 드러내며, 감상적 태도를 극복하는 것도 용이합니다. 하지만 꾸며낸 이야기임을 드러내 놓고 밝히는 결과가 되어 리얼리티가 떨어지고, 난해시(難解詩)가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화자를 선택할 때 먼저 고려할 것은 그 화자의 성(性)입니다. 그 다음 고려할 것은 연령(年齡)과 신분(身分)입니다. 연령의 문제는 아동문학이냐 성인문학이냐를 구별하는 징표 노릇을 하고, 신분은 그 시인의 시적 경향을 드러내는 구실을 하지만, 성은 이를 초월하여 모두 작용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성에 따른 화자의 유형은 다시 <남성화자(男性話者)>와 <여성화자(女性話者)>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학 작품에서 채택하는 성은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관념적 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성적 특질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프로이트(S. Freud)나 융(C. G. Jung) 같은 분석심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남성성(animus)>은 이성적(理性的) 능동적(能動的)·집단적(集團的) 성격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성성(anima)>은 감성적(感性的) 수동적(受動的)·개인적(個人的) 성격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길리건(C. Gilligan) 같은 여성심리학자들은 분석심리학 쪽의 주장이 너무 남성 중심이라면서, 남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초월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是非)의 윤리>에 의해 행동하고, 여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보살핌은 윤리>에 의하여 행동하기 때문에 여성의 의식구조가 분쟁이 잦은 현대 사회에서 더 평화적이고 유용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성 심리학자들의 이런 주장은 배우자의 잘못에 대한 남녀간의 태도를 살펴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편 와이셔츠 깃에서 루즈 자욱을 발견하면 밤새도록 추궁하다가 아침이 되면 밥을 해서 자식들에게 먹여 등교시킵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과거에 자기가 어찌 행동했던 끝까지 추궁하고, 가정 파탄까지 몰고 가기가 일수입니다. 그것은 여자들이 무감각하고, 남자들이 더 도덕적이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분노에 치떨기는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여자는 내가 이혼하면 어린 자식들은 어떻게 하나, 친정 어머니는 얼마나 슬퍼하실까, 또 동창생들은 뭐라고 수군댈까를 생각하다가 참는 것이고, 남자들은 그 일 자체만 가지고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석심리학과 여성심리학의 견해가 결코 다른 것은 아닙니다. 남성들은 관계를 초월하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여성들은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감성적이고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념 때문에 남성화자는 국가나 사회·윤리 같은 공적(公的)이면서 추상적(抽象的)인 화제에, 여성화자는 사랑·이별·아름다움 같은 사적(私的)이면서 구체적(具體的)인 화제에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화제와 화자의 성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아주 어색한 작품이 되고 맙니다.
다음의 우리 시문학사에 거봉으로 꼽히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화제의 성격과 화자의 성을 일치시키지 않아 아주 어색한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나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음으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에게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율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서릴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전문


이 작품에서 특히 어색한 곳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여자라고 그래서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인간 역사의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서릴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구절은 여성의 말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좀 더 꼼꼼히 살펴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을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고 주장하고(ⓑ), 이웃집 주인과 장군의 말을 삼단논법에 의해 인용한 다음(ⓓ,ⓖ), 능멸 받은 서러움을 하소연하기보다 고발하고 비판하는 데 치중한 점을 비롯하여, ´윤리´, ´도덕´, ´법률´이 권력(칼)과 부(황금)에 대한 숭배하기 위한(제사) 위한 수단으로 보는 발언(ⓘ)은 아무래도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쓴 데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님인 청자는 조국으로서 화자보다 상위(上位)인데다가, <나라 잃은 백성 = 님을 잃은 젊은 여>이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어색하게 보이는 것은 여성화자를 택했으면서 여성답게 말하지 않고, 시인의 성인 남성의 입장에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화자를 선택하면 의미적 국면에서부터 조직적 국면까지 완전히 그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고로 성에 따른 화자, 화제, 어법, 시어의 특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시의 의미적 국면
ⅰ) 화자의 태도와 정서 :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이성적(理性的) 능동적(能動的)으로 대응하는 화자는 남성,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감성적(感性的) 수동적(受動的)으로 대응하는 화자는 여성으로 나눈다.
ⅱ) 화제의 성격 : 국가 사회 윤리 같은 공적(公的) 추상적(抽象的) 화제를 택하는 화자는 남성, 이별 사랑 아름다움 같은 사적(私的) 구체적(具體的) 화제를 택하는 화자는 여성으로 나눈다.

② 시의 형식적 국면
ⅰ) 시형과 율격 : 상대적이지만 자유율(自由律)을 택하는 경우 자유분방한 시형은 남성, 정제된 시형은 여성으로 나눈다. 그리고 정형율(定型律)을 택하는 경우에는 4음보처럼 균형적(均衡的)이며 대응적(對應的)인 음보는 남성, 3음보처럼 가변적(可變的)이며 대응된 짝이 없는 음보는 여성으로 나눈다.
ⅱ) 음성 조직 : 기능적이고 소박한 음성은 남성, 섬세하고 장식적인 음성은 여성으로 나눈다.

2. 화자와 화제에 어울리는 시간과 공간을 선택하라

이렇게 화자가 정해진 다음에는 <언제>·<어디>에 해당하는 시간과 공간을 설정해야 합니다. 모든 존재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에 어떻게 놓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고, 또한 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밤 열두 시쯤 그렇고 그런 술집 골목에서 아름다운 여성을 만났다고 합시다. 아무리 청순하고 정숙한 여성이라 해도 그렇고 그런 여성으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골목길이라는 열린 장소로 설정했기 때문에 소변을 본다든지 짙은 사랑의 행위 같은 것으로는 그릴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존재체(存在體)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그 존재체를 지배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간>과 <공간>은 화자의 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루를 <빛의 시간>·<어둠의 시간>·<경계의 시간>으로 나눌 경우, 빛의 시간은 노동의 시간으로서 이성이 지배하는 시간입니다. 그로 인해 남성적인 화제에 더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어둠의 시간은 휴식의 시간으로서, 감성이 지배하는 시간입니다. 그로 인해 여성적 화제에 잘 어울립니다. 또 경계의 시간은 <노동↔휴식>, <이성↔감성>이 교차되는 시간으로서, 어느 한 쪽의 성이 다른 성 쪽의 성격으로 바뀌어가는 화제에 잘 어울립니다.

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봄>은 여성적 성격 가운데 순진, 화사, 희망을, <여름>은 남성적 성경 가운데 정열, 낭만을, <가을>은 여성적 성격 가운데 성숙 고뇌 우울을, <겨울>은 남성적 성격 가운데 정지 좌절 엄숙 절망과 같은 정서를 형상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연령과 연결시킬 경우 봄은 청년기, 여름은 장년기, 가을은 노년기 겨울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린 공간>은 남성적이고, <닫힌 공간>은 여성적이며, <경계의 공간>은 어느 한 쪽의 성에 다른 쪽 성의 특징이 가미되기 시작하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화제에 따라 화자를 선택한 다음에는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되, 작품 속에 다 표현하지 않더라도 화자의 성 신분 연령 심리 상태에 따라 계절과 하루 가운데 어느 시간인가, 그리고 열린 공간인가 닫힌 공간인가, 그 공간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면밀히 설계한 다음 쓰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타당하게 보이는 배경도 부분적으로 어긋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전체는 그대로 놔두고 일부분을 조절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조절은 좀 까다로운 방법이니, 제가 쓴 [칸나꽃 뒤로 보이는 풍경을 위하여]라는 작품의 완성 과정을 살펴보면서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바닷가 언덕에 있는 카페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테라스에 앉아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우리가 왜 부부이어야 하는가를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같이 사는 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공부를 하는 동안 가난에 찌들고, 그로 인해 자기 꿈을 접고 살아온 아내가 안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다를 바다라고 부르는 것도, 산을 산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메모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눈부신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아내의 머릿결을 바라보며
이 여인이 왜 내 아내가 되었으며
내가 왜 이 여인을 아내라고 부르는가를 생각해 봤다.
그리고, 바다를, 갈매기를,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걸까 생각했다.
사물의 이름과 사물의 관계가 모두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오후
까페에서 흘러나오는 나른한 음악을 들으며 한없이 침잠되다가
눈부신 바다를 바라보며 쓸쓸히 웃었다.

이렇게 메모를 하는 동안에는 제법 그럴 듯하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읽어보니 어쩐지 어색했습니다. 우선 벌건 대낮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어색하게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밤으로 설정하는 것도 어색할 것 같았습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이지만 우리 사랑이 정말 사랑인가를 따지는 것은 이성적 행위인데다가, 밤으로 설정하면 그런 생각만 하고 있는 게 더 어색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낮으로 설정한 것을 그대로 놔두고, 대낮인데도 어둠침침한 이미지를 첨가하기 위해 폭풍우가 치는 날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덧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아내를 다른 여인으로 바꾸고 다음 같이 고쳤습니다.

나는 왜 저 빗속에 날뛰는 바다를 언제나 바다라고만 부르는 걸까.
위태롭게 흔들리는 칸나꽃 뒤 쪽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굽이를 박차고 조랑말떼처럼 내닫는 빗줄기, 수평선은 번뜩이는 빗줄기에 실려 하늘로 오르고…….
그 뒤에 남는 무연한 공간을 산이나 들, 또는 죽음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걸까. 불같이 미끄러운 칸나라고 부를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왜 빗속에 흔들리는 저 칸나를 붉다고만 말하는 걸까.
꿈 속인 듯 비 속인 듯 그대가 밤마다 남기고 간 입술 자욱처럼 선연하게 타오르는 빛깔을 사랑이나 이별 또는 불같은 미끄러움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걸까.
누군가 이미 한 말 같다만 사물은 시간마다 달리 보이는 법, 그래도 관념은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까닭 없는 슬픔은 온몸 가득 번져 나른한데,
다탁 위에 놓인 내 손 끝을 잡고 애써 웃는 그대를 새롭게 부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구나.

내가 너를 안아 준 다음에는 어떻게 변할까.
너는 너,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나일까.
비를 맞으며 천연스레 흔들리는 저 칸나처럼 네가 너, 내가 나인 것도, 서로가 서로의 껍질을 벗기고 마침내 시드는 것도 두려워 망연히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가느다란 실내악(室內樂)이 들려 온다.
내 손을 잡고 파르르 떠는 네 손의 투명한 실핏줄에서도, 아까부터 같은 박자로 흔들리는 칸나 꽃잎에서도, '

하단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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