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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이달균 칼럼>
2007년 4월 11일자
누가 노산(鷺山)의 무덤에 삽을 꽂는가
마산의 `은상이 샘´(노산 이은상이 마시고 자랐다는 샘)을 마산의 한 시민단체가 굴삭기로 파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작년에도 그랬으므로 해마다 반복될 사안처럼 보인다.
두 시인이 있었다. 한 시인은 친일하지 않았음에도 한 시민단체의 `친일 혐의´에 덧씌워 흡사 친일 매국노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더 황당한 일은 일제 말 “만주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중 밝혀진 사실은 광양 백운산 자락에 몸을 피해 있었고 결국 일경에 검거되었다. 이후 이렇다 할 친일 행적이 밝혀지지 않자 이번엔 독재의 부역자라는 꼬리표를 달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다른 한 시인은 `무의미의 시´를 주창하였고, 경북대학 교수, 영남대학장을 거치는 등 교직과 창작활동으로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이 시인에겐 족쇄처럼 따라다닌 이력 하나가 있다. 바로 1981년도에 제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 것이다. 알다시피 당시 민정당 전국구 의원은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거수기 노릇을 위해 지명된 자리였다.
먼저 언급한 시인은 노산 이은상이고 뒤의 시인은 김춘수다. 그들은 공히 이 지역 대표적 문인이며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들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노산은 한 시민단체로부터 가장 배척해야 할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고, 김춘수는 3·15국립묘지에 버젓이 시비(詩碑)로 기념하고 있다.
노산이 독재에 부역하여 배척되어야 한다면 김춘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김춘수가 비록 그런 과거를 가졌다 하더라도 문학에 끼친 공로가 크므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노산 역시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지역 시민단체가 민주성지의 지킴이 노릇을 하겠다면 엄정하고 분명한 평등의 잣대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도 유독 노산에 대해서만 비판의 화살을 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우리 지역의 문인 중 친일 글을 남겼거나 행적이 있는 이들의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 보자. 교과서에 `5월의 유혹´이란 시가 실렸던 마산의 김용호, `고향의 봄´의 시인 창원의 이원수, `현대문학´지를 창간하고 반석에 올린 함안출신의 평론가 조연현, 한국연극계의 선구자로 불리는 통영출신 유치진 등이 쉽게 떠오른다.
친일문학을 가장 먼저 연구한 임종국의 저서 `친일문학론´에는 수천 명 문인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지만 노산의 이름은 없다. 그런데도 굳이 노산을 표적 삼는다. 처음엔 친일혐의로 시위를 당겼다가 여의치 않으니 독재정권의 부역자로 표적을 삼는다.
몇 해 전 제주의 성산일출봉을 올라간 적이 있다. 그곳엔 백발의 노인들 여남은 분이 모여 감회에 젖고 있었다. 그리고는 목청껏 `가고파´를 불렀다. 그들은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에 나가 사는데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이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이미 `가고파´는 마산의 노래가 아니라 민족의 노래가 되어 있었다. 이렇듯 타국에 사는 이들에게 고국의 향수를 달래는 시를 지은 노산은 시인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였다.
해마다 `은상이 샘´을 파묻어 버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가고파´, `옛 동산에 올라´, `그 집 앞´, `성불사의 밤´, `봄 처녀´ 등등을 부르며 자랐을 것이다. 노산이 비록 독재에 부역하였다고 하나 시로써 국민들의 정서 순화에 보탬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 사실마저 굴삭기로 덮을 수는 없다. 우물을 덮어 흔적마저 없애겠다는 것은 아예 역사에 이름을 지우겠다는 발상이 아닌가. 더 이상 노산의 무덤에 삽을 꽂지 마라. 영광이든 부끄러움이든 묻어서 없애버리기보다 살려서 후대에 전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역사의 기록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야 하고 공과를 분명히 해야 한다. 노비산에 노산문학관이 세워지지 못했지만 만약 세워졌다면 이런 표지석을 세워 교훈으로 삼을 수도 있었으리라.
“노산 이은상은 민족의 전통시인 시조 창작을 통해 한국현대문학을 융성 발전시켰다. 사향의 노래 `가고파´로 인해 마산을 `가고파의 도시´로 불리게 했다. 일제 땐 투옥과 구금이 되는 등 독립을 위해 애썼다. 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 숭모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1969년엔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을 지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자유당 정권을 위해 강연을 다녔고, 군사정권에도 부역한 것은 크나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이달균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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