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통영나들이-경남도민일보
작성자 munhak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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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이 앉았을 법한 충렬사 돌계단.
◇ 백석의 통영 = 백석의 고향은 평북 정주다. 백석은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22살에 <조선일보>에 입사한다. 4년후 첫 시집 <사슴>을 출간한 후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은 뒤 함흥 영생고보 교원으로 전직한다. 그리고 1938년 잠시 서울에 머물다가 이듬해 만주로 이주하게 된다.
얼핏 보면 백석은 남쪽의 끝자락 통영과는 인연이 없을 법도 하다. 실제 그가 쓴 시편들은 대개가 북방 지역 사투리를 사용하며 진한 토속성을 견지하고 있기에 ´통영´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백석은 ´통영´이라는 제목을 단 시를 3편이나 남긴다. <백석전집>(1987, 실천문학사) 어디에도 똑 같은 제목이 3번씩 나온 경우가 없다. 왜 백석은 그렇게 반복해서 ´통영´을 노래했을까? 일단 이 궁금함은 차차 풀어보기로 하고, 평안도 출신 백석이 본 ´통영´의 모습부터 살펴보자.
1935년 12월 <조광>에 발표한 ´통영´이다.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 방에서 만났다/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가 나는 비가 나렸다'
이 때의 경험은 1935년 6월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백석은 두번째 통영행을 한다. 때는 1936년 1월이었다. 시 속에 등장하는 ´천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두번째 ´통영´에서는 구체적인 지명 ´명정골(현재의 통영시 명정동)´이 나온다. 명정골은 시에서도 볼 수 있듯 ´명정´이라는 샘이 있는 마을인데, 이 ´명(明)정´은 ´일(日)정´과 ´월(月)정´을 합쳐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실제 통영 출신 작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에는 ´명정´이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위 시에서 나오는 ´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은 물론 명정 옆에 있는 ´충렬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20대 중반의 백석은 동백꽃 나무가 줄 지어 선 충렬사 돌계단에 앉아 ´한산도 바다´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석의 통영 방문에는 모종의 로맨스가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백석이 그려낸 ´통영´의 모습을 박태일 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통영을 고향으로 가진 대표 문학인인 청마 유치환이 고향 앞바다를 향해 부른, 억세고도 짐짓 허황된 ´깃발´의 목소리와는 사뭇 달리, 따뜻한 마음과 쉬 다치기 쉬운 섬세한 눈길로 푸른 통영 바다를 사랑의 기쁨과 애잔함이 한꺼번에 뭉게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곳으로 우리 앞에 남겨 주었다.'(<지역문학연구(1999)> 28p)
스캔들이랄 수도 있고 로맨스랄 수도 있는 백석의 통영 방문은 어떻게 끝 맺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후 그의 시 속에 ´통영의 경험´은 어떻게 발현되고 있을까? (하)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잘 몰랐던 경남 문학지대]⑪백석의 통영 나들이 (상) | |||||||||
´이역만리´ 평안북도서 통영을 꿈꾼 ´로맨티스트´ 토속적 언어로 뛰어난 서정성 포착, 해방감 안겨줘…´통영´ 소재작 3편 남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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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월북 시인 120명에 대한 해금조치가 발표되면서, 그동안 불리지 못했던 시인들이 호명되기 시작했다. 이용악·오장환 등의 시편들은 ´아름다운 시´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했고, 그 중 단연 으뜸은 백석(본명 기행, 1912∼1995)이었다. 백석의 시는 놀라움이었고 일종의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토속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뛰어난 서정성을 포착해내고 있는 백석의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었으며, 연구되기 시작했다. 백석은 지난해 <교수신문>이 신진 문인 95명(평론가·소설가·시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선배 문인으로 이상·김수영과 함께 거론되었다. 이 조사에서 실체에 비해 과대평가 되어온 문인으로 이문열·고은·서정주가 꼽힌 것과 비교해 보면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다. 또 평론가 김현은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일컬어 '한국 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 중 하나'라고 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도 더욱 유명한 백석. 그의 흔적을 통영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니 통영이 백석의 가슴에 흔적을 남겼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백석이 앉았을 법한 충렬사 돌계단.
◇ 백석의 통영 = 백석의 고향은 평북 정주다. 백석은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22살에 <조선일보>에 입사한다. 4년후 첫 시집 <사슴>을 출간한 후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은 뒤 함흥 영생고보 교원으로 전직한다. 그리고 1938년 잠시 서울에 머물다가 이듬해 만주로 이주하게 된다.
얼핏 보면 백석은 남쪽의 끝자락 통영과는 인연이 없을 법도 하다. 실제 그가 쓴 시편들은 대개가 북방 지역 사투리를 사용하며 진한 토속성을 견지하고 있기에 ´통영´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백석은 ´통영´이라는 제목을 단 시를 3편이나 남긴다. <백석전집>(1987, 실천문학사) 어디에도 똑 같은 제목이 3번씩 나온 경우가 없다. 왜 백석은 그렇게 반복해서 ´통영´을 노래했을까? 일단 이 궁금함은 차차 풀어보기로 하고, 평안도 출신 백석이 본 ´통영´의 모습부터 살펴보자.
1935년 12월 <조광>에 발표한 ´통영´이다.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 방에서 만났다/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가 나는 비가 나렸다'
이 때의 경험은 1935년 6월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백석은 두번째 통영행을 한다. 때는 1936년 1월이었다. 시 속에 등장하는 ´천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두번째 ´통영´에서는 구체적인 지명 ´명정골(현재의 통영시 명정동)´이 나온다. 명정골은 시에서도 볼 수 있듯 ´명정´이라는 샘이 있는 마을인데, 이 ´명(明)정´은 ´일(日)정´과 ´월(月)정´을 합쳐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실제 통영 출신 작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에는 ´명정´이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위 시에서 나오는 ´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은 물론 명정 옆에 있는 ´충렬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20대 중반의 백석은 동백꽃 나무가 줄 지어 선 충렬사 돌계단에 앉아 ´한산도 바다´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석의 통영 방문에는 모종의 로맨스가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백석이 그려낸 ´통영´의 모습을 박태일 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통영을 고향으로 가진 대표 문학인인 청마 유치환이 고향 앞바다를 향해 부른, 억세고도 짐짓 허황된 ´깃발´의 목소리와는 사뭇 달리, 따뜻한 마음과 쉬 다치기 쉬운 섬세한 눈길로 푸른 통영 바다를 사랑의 기쁨과 애잔함이 한꺼번에 뭉게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곳으로 우리 앞에 남겨 주었다.'(<지역문학연구(1999)> 28p)
스캔들이랄 수도 있고 로맨스랄 수도 있는 백석의 통영 방문은 어떻게 끝 맺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후 그의 시 속에 ´통영의 경험´은 어떻게 발현되고 있을까? (하)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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