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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문인 김상훈-경남도민일보
작성자 munhak
댓글 0건 조회 4,121회 작성일 2007-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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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몰랐던 경남문학지대]⑨거창 가조 출신 김상훈(상)
뜨거운 열정 불태웠던 ´월북시인´ 6·25직전 보도연맹 가입 전향
남로당 계열 숙청 영향, 70년초부터 시 발표

newsdaybox_top.gif2007년 08월 07일 (화) 글·사진/임채민 기자 btn_sendmail.giflcm@idomin.comnewsdaybox_dn.gif

거창군 가조면. ´특이하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신비스러운 기운마저 감도는 땅이다. 두무산과 오도산 등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분지로, 넓은 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거창읍에서 가조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군 단위의 경계를 넘는 것처럼 고달팠다. 가조면은 거창사람들에게 김태호 도지사의 고향으로 회자되는 곳이기도 하다.

가조면사무소를 지나 가조온천 지구 쪽으로 들어갔다. 들이 너무 넓어도 목적지를 찾기는 어려운 법인 것같다. 원래 가고자 했던 ´일부리 부산 마을´을 조금 지나고 말았다. 당산나무 아래 모여있는 동네 아낙네들에게 부산마을이 어딘지 물었다. 신문사 로고가 박힌 취재차량을 본 그네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왜? (김태호)도지사 고향 찾으려고?'였다.





 

 

 

 
거창군 가조면 가조온천 지구 입구에 있는 김상훈 시비. 다천 김종원의 필치가 멋스럽다.
 

 ◇ 40여년 만에 드러난 ´월북시인´
= 김상훈(1919∼1987)은 ´월북시인´이다. 1988년 정부의 납북·월북문인에 대한 해금 조치 이후부터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광복기 활발한 문필 활동을 벌인 김상훈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진 편이다. 40여 년동안 풍문으로 나돌던 김상훈에 대한 기록을 공개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또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유족(김종철·김종석)들에 의해 생전에 남긴 작품이 공개되기도 했다.

김상훈은 1919년 ´상산 김씨´ 집성촌인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 부산 마을에서 태어나, 18세까지 그 곳에서 전통적인 서당 공부를 한다. 그러다 늦은 나이에 서울 중동중학교(5년제)에 입학하게 되고 유진오 시인과 만나 함께 문학수업에 열중한다. 이후 이들은 1946년 김광현·박산운·이병철 등과 함께 공동시집 <전위시인집(노농사)>을 발간한다.

김상훈은 여러 항쟁시를 남겼다. 그러나 지나치게 ´전투적이고 살벌하지´는 않았다. '마치 <시경>을 읽는 느낌을 주고…그 표현에서 장중미와 골계미를 함께 전해주는 전형적인 우리 민족의 정서가 스며있다(<김상훈 시연구> 41p)'는 평가다.

◇ 상처와 좌절감에 몸부림 = 해방되기 전부터 입북하기까지 김상훈의 이력은 신산스럽다. 물론 자의반 타의반에 의한 것이었고, 역사의 한 가운데서 뜨거운 열정을 불태웠던 측면에 무게가 실린다.

김상훈은 해방 직전인 1944년 원산철도공장에 강제징용 되었고, 이후 발군산(강원도 춘천 일대)에 입산해 무장항일투쟁운동에 가담하기도 한다. 광복 이후에는 좌익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6·25 전쟁 직전에 보도연맹에 가입함으로써 공식적인 전향을 한다.

김상훈은 당시 함께 보도연맹에 가입한 정지용(1902∼1950) 시인과 함께 전국 순회 ´전향강연´을 하게 된다. 이때 김상훈은 정지용 시인을 보며 ´지용선생이 이제 시를 못쓸 것 같이 고민하는 것이 보기 딱하다´는 안타까움을 느꼈고, 정지용 역시 김상훈을 향해 ´아까운 젊은 시인이 세월을 잘못 만나 고생한다(<김상훈 시연구> 33p)´는 말로 아껴 주었다고 한다.

1950년 서울이 인민군 치하에 들어갔을 때, 김상훈은 한번 더 ´변신´을 하게 된다. 1950년 8월 의용군에 입대해 전선에 투입되고, 그해 10월 유엔군에 쫓겨 단신 입북한다.

1950년 초와 1960년대 초 북한에서 남로당 계열 문인이었던 임화·김남천·이태준·한설야 등이 숙청된 영향 때문인지, 김상훈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1970년 초반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영화감독 신상옥(1926∼2006)이 북한에 머물던 때 김상훈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를 회상하는 기록은 이채롭다. '김상훈은 1986년 (최)은희와 나를 초대하기로 했으나 우리는 방문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 무렵에는 우리들의 탈출 계획이 완성된 단계여서 우리들의 도망 후 만일 그에게 피해가 미칠지 모른다고 염려되었기 때문이다.(<김상훈 시연구> 36p)'

현재 거창군 가조면 가조 온천지구 입구에 김상훈 시비가 있다. ´종달새´라는 시를 ´다천 김종원´이 멋스러운 필치로 새겨넣었다.

'금실바람 은실바람/노랑 꽃잎 향내 묻어/아지랭이 아지랑이/봄은 자꾸 가자는데//떴다!/종다리/불길같은 울음소리/넋이 소리되어/하늘 가득 우는 소리//청춘을 못다 산/이 골안 젊은이의/피맺힌 그날의/한 많은 사연인가//보리고개 넘다가/통곡을 하던/강 마을 어머니의/기나긴 설움인가//못배겨 못배겨/안울고는 못배겨/내일을 불러서/몸을 태우는//종다리, 아아/갈망의 새야/봄은 가자는데/너만 우느냐'

(하)편에서는 가조면 일부리 부산 마을에 남아 있는 김상훈(상산 김씨 가문)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한다.
[잘 몰랐던 경남문학지대]⑩거창 가조 출신 김상훈(하)
작품은 ´어둠속´…노래는 ´햇살속´
´월북´으로 문학세계는 뒷전…거창 가조초교 교가는 아직도 불려

newsdaybox_top.gif2007년 08월 14일 (화) 글·사진/임채민 기자 btn_sendmail.giflcm@idomin.comnewsdaybox_dn.gif

김상훈은 태어나자마자 이웃에 살았던 백부 김채환의 양자로 들어간다. 김채환은 가조 지역은 물론이고 거창 일대에서 널리 알려진 천석꾼이었다. 그러나 그 천석꾼 집안은 김상훈의 좌익활동과 월북으로 인해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집안의 몰락과 월북. 김상훈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는 어려운 조건이다. 그런데 가조 지역에서는 김상훈의 숨결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었다. 지난했던 반공 콤플렉스와 난무했던 폭력 속에서도 김상훈은 사라지지 않고 가조에서 숨쉬고 있었다.





 

 

 

 ◇ 천석꾼 집안의 몰락
= 김상훈은 평소 친구들에게 '아버지는 한민당, 나는 공산당'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곤 했다. 또 김상훈이 보도연맹에 가입하기 직전 경찰에 잡혔을 때 아버지 김채환은 백방으로 뛰고 보증해 김상훈을 빼내는 열의와 수완을 보였다. 이를 두고 김상훈은 '한민당이 공산당을 석방시켜 줬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부자간의 이념 갈등은 급기야 부친 김채환이 대문간에 ´빨갱이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써 붙이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김상훈 시연구> 22p)

김상훈은 그의 시 ´아버지의 문앞에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등짐지기 삼십리길 기어넘어/가쁜 숨결로 두드린 아버지의 문앞에/무서운 글자 있어 공산주의자는 들지마라…'

김상훈은 15세가 되던 해 조혼을 한다. 그런데 이 결혼은 1년 만에 끝이 나고 만다. 해산하던 아내가 뱃속의 아기와 함께 사망했던 것이다. 이후 19세때 두번째 결혼을 하고 3남 2녀를 두게 된다. 그리고 1949년엔 서울에서 강재화와 세번째 혼인을 한다.

이때 집안은 토지개혁 등으로 몰락의 길을 접어들고 있었다. 또한 김상훈 주변의 동료 문인들은 월북을 계속하고 있기도 했다. 김상훈은 모친 별세 이후 새살림을 차린 아버지와 자신의 주선으로 상경한 생모를 돌봐야 했다. 아마도 이러 저러한 현실적 상황이 김상훈의 월북을 막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상훈은 결국 한국전쟁 시기 의용군으로 참전하게 되고, 북으로 밀려들어 간다.

김상훈의 두번째 부인 임봉조는 이때 거창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현재 김상훈의 생가 바로 옆에서 살고 있는 김상훈의 9촌 조카 김윤자(여·69) 씨는 '큰 할아버지가 땅이고 집이고 다 팔아버리고 나니 아주머니(임봉조)는 친정에 가서 아이들을 키웠지.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삼촌(김상훈)은 삼촌대로 그때 서울에서 결혼을 한 상태였고…. (김상훈은) 참 똑똑하고 잘 생긴 양반이었는데…'라고 말했다.

◇ 굳건하게 이어져 온 가조초등학교 교가 = 1930∼40년대는 농촌 지역에 하나 둘 학교가 세워지면서, 그 지역 출신 문인들이 학교 교가를 짓는 일이 잦았다. 1922년에 세워진 가조초등학교도 마찬가지다. 해방후 잠시 고향에 와 있던 김상훈은 모교를 방문해 교가의 노랫말을 지었다. 이 교가가 지금까지도 불리고 있었다. 1년에 한번씩 열리는 가조초등학교 총동문회 행사 때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부터 갓 졸업한 10대들까지 모두 이 교가를 입모아 부른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은 김상훈이 월북시인이라는 점이다. 월북시인이 지은 교가가 1950∼80년대를 거치는 동안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지가 궁금했다. 실례로 좌익 계열에 몸담았던 남대우<본보 6월 4일·6월 12일자 12면 보도>의 경우 하동초등학교 교가를 작사했으나, 해방 이후 다른 노래로 바뀌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이러한 예는 허다할 것이다. 김상훈이 지은 교가 속에는 천박한 반공주의 폭력에 의해 금기시 되다피시 했던 ´동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이 학교 졸업생이기도 한 가조초등학교 신계성(55) 교감은 '김상훈이 월북시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흔한 이름이기도 해서 몇몇 집안사람들만 알았다 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을 수도 있다. 이 교가를 지은 김상훈이 월북시인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면 군사정권 시절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겠나. 어쨌든 우리는 이 교가를 자랑스럽게 불렀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문학적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때, 그가 남긴 작품이 어둠 속에 묻혀 있을 때, 그의 모교에서는 그가 지은 노래가 불리고 있었다. 김상훈은 잠시 잊혔지만 잊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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