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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2) ‘도깨비 친구’ 아동문학가 임신행 씨 | |
어둠 속에서 꿈과 희망의 불씨 피워냅니다 작가의 어린 시절처럼 불행한 환경의 아이들 보듬는 데 주력 | |
남해에 있는 도깨비 집을 아시나요. 온갖 요상하고 신비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그곳엔 일흔살 먹은 도깨비가 살고 있습니다. 때론 자상한 할아버지로, 때론 편안한 옆집 오빠로, 또 때론 장난꾸러기 짝지로 변신하는 그 도깨비의 분장술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그 도깨비의 방망이 끝에서는 늘 상상 속에서만 꿈꿔왔던 놀라운 일들이 펼쳐집니다. 하늘이 아찔하게 높던 어느 가을날, 문득 그 도깨비가 보고 싶어 보물섬, 남해로 향했습니다. 무작정 나선 길이었습니다. 남해 초입, 갑작스레 빗방울이 차유리를 두드립니다. 어느덧 남해시 창선면 부평리에 도착해 차가 지나지 못하는 한적한 시골길을 굽이굽이 걸어 들어가자 집 한 채가 보입니다. 담쟁이 덩굴이 엉킨 채 벽을 감싸고, 쇳문이 뿌식뿌식 녹슬어 있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살 것 같지 않은 곳, 이곳이 바로 그 도깨비 집입니다. 집 앞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지닌 아동문학가 임신행씨가 어느새 마중을 나와있습니다. 도깨비처럼 늙지 않고, 도깨비처럼 꿈을 만들어주고,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듯 뚝딱 뚝딱 작품을 발표해내는 작가 임신행. 마치 ‘도깨비 친구’ 같은 그의 작품세계를 만나기 위해 성큼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불운한 유년시절이 남긴 자국 “내 암울한 유년의 경험은 나의 작품세계에 지긋지긋하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예술은 자기 경험과 상상의 부산물이다. 임씨의 작품세계도 그의 유년시절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임씨는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그의 어머니는 고향을 찾아 아이들의 손을 잡고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세 사람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임씨의 곤고한 유년은 여기부터 시작이었다. 홀어머니는 임씨와 동생을 친정에 맡기고 행상에 나섰고, 빈 부모의 자리와 궁핍함은 그의 유년시절에 암울과 불안, 소외와 천대라는 자국을 남겼다. 곤고한 유년시절은 초·중·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간판집 견습공, 실공장 견습공, 숯장사와 야경꾼, 짐꾼 노릇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끼니를 때우던 소년의 가슴엔 문학에 대한 열망만이 희망처럼 반짝였다. 유일한 휴식처는 보수동 헌책방뿐이었다. 1961년 국학대학 주최 전국 고교생 문예작품 모집에 소설 부문에서 당선되고 나서 그는 처음으로 기지개를 켰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유문학’에 단편소설을 투고하여 당선 없는 가작에 뽑혔고, 그것이 그의 삶을 바꿨다. 그의 어린 시절처럼 소외되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을 다독이는 동화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는 “유린되고 파괴된 결손 가정에서 자라며 작품 속에서나마 이별 없는 세상을 건설해보자는 야망과 동심의 자작나무 숲을 형성하고자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소외받고 연약한 이들의 이야기를 보듬는 데 주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그의 동화 속 주인공은 대부분 불행한 환경에 처해 있거나, 쓸쓸한 시대를 이기며 살고 있다. 어둠 속에서 작은 불씨를 피워낸다는 식이다. “우리의 삶은 밝음이나 즐거움보다 슬픔 쪽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저는 슬픔 속에서 피는 가시연꽃처럼 조금은 서러워보이는 작품 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혼을 흔드는 감동은 웃음보다는 우수에서 옵니다.” 작가의 변이다. 진주 경상대 강희근 명예교수는 임씨의 작품을 이렇게 정리했다. “임신행 작가의 작풍(作風)은 추상적 내용이나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그러한 류의 것이 아니고 현실감각이나 아동들이 추구하는 이상론적인 것을 좀 더 리얼하게 가까운 곳으로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어린이들로 하여금 실제와 같은 느낌으로 감동을 주게 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래서인지 임신행 작가의 작품 중 상당수가 아동들에게 인기와 사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인에 이르기까지 독자층이 매우 두텁다.”
▲전쟁, 자연 그리고 아이들 “작품은 경험”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동화 속 이야기는 대체로 그의 주변에서 짜낸 것들이다. ‘배고픈 산골소년’은 자연과 친화된 아이들을 그려냈고, ‘월남전 참전용사’는 전쟁 속 아이들을 이야기했고, ‘시골 초등학교 교사’는 군중과 단절돼가는 농촌·섬 아이들의 현실을 토로했다. 그의 첫 동화 ‘베트남 아이들(교학사刊·1966년)’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끔찍한 전장의 장면과 비참한 폐허같은 주민들의 삶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그러한 상황에도 꿈을 꾸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희망이 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한국 아동문학 유산을 다채롭게 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전쟁과 관련된 연작을 여러 편 내놓았다. “2년간 월남에서 생활하면서 만났던 아이들을 동화 속에 출연시킨거죠. 전쟁 속에서 아이들이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지를 알리고 싶었고, 그 아이들에게도 꿈과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이후 교사로 취직한 그는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자연주의 동화에 빠져들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공식 등단작 ‘하얀성게’에 이어 ‘꽃불속에 우리는 방울소리’, ‘섬진강 아이’ 등을 연이어 발간하면서 그는 자연과 아이들에 대한 관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자연과 자연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연약한 것에 대한 연민이죠. 산, 동굴, 섬, 억새숲 등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군상 속에 적응해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 자연을 모르는 도시 아이들에 대한 우려같은 거죠.” 특히 그의 장편소설 ‘지리산 아이(1974년)’는 토속적인 미학과 원초적인 동심이 돋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이재철 문학평론가는 이 작품을 “원시적 인간의 건강하고 야성적 면모를 희구하고 있는 점에서 윤리적 껍질을 벗어던지고 순수 무구한 원색적 행동에 대해 무애한 표현으로 접근하고 있어 자못 탐미적이기까지 하다”고 평했다. 이 밖에도 그는 통일, 도깨비, 편견과 오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썼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이 ‘평화’에 가닿는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화평하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어요, 저는 편견과 오해 속에 멸시당하면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좋은 생활 환경 속에서 도깨비처럼 삶을 향유하고 싶어서 이 같은 주제에 몰두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꾸준히 창작활동을 할 예정이다. 아직도 매일매일 글샘이 솟아난다고 한다. 그에게 앞으로 어떤 동화를 쓰고 싶은지 물었다. 그의 답은 짧았다, “지고지순한 젊은 어머니의 품(모성) 같은 순연한 정을 데생한 작품들을 생산하고 싶습니다.” ☆임신행 작가는=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는 이후 40여년간 총 160여권에 달하는 책을 펴냈다. 평균 1년에 4권꼴로 발간한 셈이다. 그 부지런한 열정은 초인적이기까지 하다. 이렇듯 쉴새없이 작품을 쓰는 이유에 대해 그는 “작가는 하나에도 써야 하고, 둘에도 써야 하고, 셋에도 써야 하고, 오직 쓰는 일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의 저서 중 대표작을 꼽자면 ‘겨울 망게’ ‘꽃불 속에 우리는 방울소리’ ‘섬진강 아이’ ‘지리산 아이’ ‘안개섬 아이’ ‘골목마다 뜨는 별’ 등이 있다. 신들린 듯 작품을 펴냈기에 평단에서는 그의 작품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문학상, 세종아동문학상, 한국어린이도서상(저작부문), 눌원문화상(문학 본상), 계몽아동문학상, 황금도깨비대상(민음사 제정), 민족동화문학상, 방정환 아동문학상 등 한국의 권위있는 아동문학상은 대부분 받음으로써 작가적 기량과 작품의 가치를 실증적으로 확인시켜 줬다. 1960년대 교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하동, 창녕, 마산 등지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40여년을 지냈으며, 지난 2002년 정년퇴임을 했다. 이후 작고하신 어머니가 살던 남해 고가에서 고사리 농사를 짓고 글을 쓰며 평화로운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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