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호)김병호(계림(鷄林))
- 본명
- 출생년도
- 출생지하동/진주
- 거주지작고
- 장르시/아동문학
- 소속
- 활동사항작고
본문
'
- 1904년, 갑진년(甲辰年)11월16일 경남 하동군 하동읍 목도리(당시 진주부에 속함)에서 출생./이력서 등에는 출생년도를 1906년으로 표시함.
부 김상두(金相斗)와 모 김장아(金長兒) 사이에 2남 3녀 중 차남[장남은 병구(炳九)]으로 태어남.
- 본관은 의성(義城). 호: 계림(鷄林)
-부친이 어장 일을 하다 실패한 후 진주로 이사함.
-결혼과 동시에 분가( 진주시 평안동 201번지로 본적지가 됨)/(1963년 9월 3일 부산시 동구 범일5동 656-9번지로 전적함).
- 1925년(22세) 3월 경상남도 공립 사범학교(현 진주교육대학교 전신) 특과를 1회로 졸업,
진주에서 조선공립보통학교 교사를 하게 됨. 재학시절 엄흥섭, 손풍산 등과 교유하며 시를 습작함.
-1925년 [조선문단] 4월호에 시 <안진방이꽃>이 독자 투고되어 당선됨. 12월 일본 동경에서 발행되던 시 전문지 [일본시인]에 일어시를 투고 발표함.
- 1927년(24세) 3월 31일 진주공립보통학교로 전근.
- 1928년(25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오호대나옹>이 입선됨. 이후 [조선일보], [중외일보]에 시를 발표함. 3월에 진주에서 진학문 등과 함께 [신시단]을 창간하고, 시 <살생>을 발표함.
- 1929(26세) 3월에 일어시 <나는 조선인이다>를 일본잡지 [전기]에 발표함. [조선시단] 제5호(1929.4)의 ´청년시인 백인집´에 시 <어촌의 황혼>을 발표, [문예공론] 창간호(1929.5)에 시 <조선아!>가 양주동의 추천으로 신진시단에 발표됨. [별나라] 1929년7월호에 동시 <가물음>, <이사>를 발표함. 이 때부터 동시를 본격 쓰기 시작함. 동화 <부길이와 평길이>, <쉬는 날>을 [조선일보]에 발표함.
- 1930년(27세) 3월 31일 김해 생림공립보통학교로 전출됨에 따라 가족과 헤어짐.
-1930년 이후 [별나라], [신소년] 등에 상당수의 동시와 과학 관계 글을 발표하는 한편 [대중공론], [여성지우], [음악과 시] 등에 시와 수필을 발표함.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을 신문, 잡지에 집중 발표함.
- 1931년(28세) 3월 8인 공동 프롤레타리아동요집 [불별](중앙인서관)을 간행함( 이 동요시집에 5편의 동시를 발표). [별나라]에 과학 관계 글을 매호 마다 발표함.
- 1932년(29세) [비판], [여인] 등에 시 발표.
- 1933년(30세) 3월 31일 창원 소재 대산공립보통학교로 전근. [신소년], [별나라]등에 동시를 발표하며 김탄(金彈)이란 필명을 사용함. [전선], [비판]에 시를 발표함.
- 1935년(32세) [비판]에 시를 발표함.
- 1936년(33세) 4월 30일 악양공립보통학교로 전근.
- 1939년(36세) 1월에 임화 편, [현대조선시인선집](학예사)에 시 <여수>를 발표함. 이후 광복 때까지 시 창작 활동을 중단함.
- 1940년(37세) 3월 31일 묵계간이학교로 전근.
- 1944년(41세) 11월 15일 훈장 팔등수서보장을 받음.
- 1945년(42세) 9월에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 동맹원으로 가담. 10월 31일 진주시 정촌 소재 예하공립국민학교 교장 겸 교사로 근무. 시 창작 활동을 재개함.
- 1946년(43세) 2월에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 진주지부장을 역임. 4월 30일 합천군 용주면 소재 용주공립국민학교로 전근. 시 <말>을 [중외정보] 창간호(1946.6)에 발표함.
- 1947년(44세) 2월 21일 사천시 곤명면 정곡리 소재 완사공립국민학교장으로 전근. 동교의 교가를 지음. 12월 31일 사천시 사동면 소재 사동공립국민학교장으로 전근. 당시부터 서울 등지로 방랑생활을 하다 좌천을 거듭 당함.
- 1948년(45세) 8월15일 거제시 하청면 소재 칠천공립국민학교장으로 전근. 동교의 교가를 지음.
- 1950년(47세) 11월 20일 진양군 수곡면 소재 수곡국민학교장으로 전근.
- 1952년(49세) 3월 31일 함양군 수동면 소재 상내국민학교장 (현 수동초등학교에 병합됨)으로 전근.
- 1954년(51세) 4월 29일 함양군 백전면 소재 백전국민학교장으로 전근. 금누 중 신병으로 해임됨.
- 1955년(52세) 차남 영기가 있던 부산 범일동으로 거주지를 옮김. 부산에서 발행된 민주신보 교열기자로 2년 정도 근무하다 다시 발병하여 방랑생활을 함.
- 1959년(56세) 방랑생활을 하다 귀가했으나, 3월 15일(음력) 위암으로 사망함(부산 전포동 소재 황령산 시립공동묘지에 유해가 안치됨).
-----자료 : 박경수 편저 <잊혀진 시인, 김병호의 시와 시세계>에서
김병호(金炳昊.1904.11.16.∼1959.3.15)
시인. 경남 하동읍 목도리 출생.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계림(鷄林), 필명은 탄(彈).
1925년 경남공립사범학교 특과 1회 졸업, 진주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출발, 사범학교 재학시절 엄흥섭(嚴興燮)ㆍ손풍산(孫楓山) 등과 더불어 시를 습작했고 같은 해 4월호 [조선문단]에 시 <안진방이 꽃>이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오호대나옹(嗚呼大奈翁)>이 입선되고, 이어 진주에서 8월에 시 전문지 [신시단(新詩壇)]을 엄흥섭ㆍ김찬성 등과 발간하였다. 그는 [신시단]을 낼 때부터 계급주의 관점에 서 있었고 광복이 되던 해에 [조선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에 가담,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진주지부장을 지냈다.
1954년 함양 백전면 소재 백전국민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신병으로 해임되자, 부산에서 [민주일보] 교열기자로 2년 정도 근무했다. 이후 4년간 그는 방랑을 거듭하다가 귀가했지만 1959년(56세) 위암으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유해는 부산 전포동 소재 황령산 시립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가 쓴 작품은 밝혀진 현황으로는 시 78편, 동시 17편, 동화 2편, 비평 10편, 수필 5편, 민요 번역 1편, 과학문 18편, 기다 2편에 이른다.
김병호는 소년시절부터 방랑벽이 심했다. 가정도 결코 평탄스럽지 않아서 결혼한 지 6년만에 부인을 잃고 첫아들과 큰딸을 잃었으며 둘째 아내를 맞았지만 특유의 방랑벽이 가정을 황폐하게 했다.
시인.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목도리(당시 진주부)에서 출생하였다. 본적은 경상남도 진주시 평안동 201번지(진주대로 1079번길 4)이며, 아버지 김상두(金相斗)와 어머니 김장아(金長兒)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이다. 1925년 경상남도공립사범학교(현 진주교육대학교 전신) 특과 1회 졸업.
첫째부인 신씨(辛氏)와 결혼하여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고, 신씨가 사망하자 새로이 정옥봉과 결혼하여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경상남도 진주와 인근지역에서 교사 및 교장으로 근무하였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다수의 시작품은 물론 동시, 동화, 비평, 수필 등의 여러 방면에서 창작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 진주지부장이 되었으며, 경상남도 부산 [민주신보]의 교열기자로도 활동하였다.
1925년 [조선문단]에 독자투고한 시(詩) <안진방이 꽃>이 당선되고,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오호대나옹(嗚呼大奈翁)>이 입선된 이후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8년 3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신시단(新詩壇)]을 창간, 발행하며, 동화도 창작하였다. 1931년 3월, 8인 공동 프롤레타리아 동요집 <불별>을 간행, 이때부터 필명인 ‘김탄(金彈)’을 사용하였다.
지금까지 밝혀진 김병호의 작품은 시 78편, 동시 17편, 동화 2편, 문학론 및 비평 10편, 수필 5편, 민요번역 1편, 과학문 18편, 기타 2편으로 시인으로서의 활동이 뚜렷하다.
<안진방이 꽃> <설야> <고적(孤寂)> 등의 작품은 계급주의 의식을 바탕으로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으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작품들이 많다.
1959년 3월 15일 위암으로 사망, 경상남도 부산 전포동의 황령산 시립공동묘지에 묻혔다. 1944년 11월 15일 ‘팔등수서보장(八等授瑞寶章)’의 훈장을 받았다.
【작품세계】
김병호의 작품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당대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많으며 사회 참여적 성격이 강했다.
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활동한 최초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 주체성의 회복과 사회의식의 표출, 체험의 사실주의적 형상화는 민족저항시의 범주와 현대서정시 사이의 교량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시】<안진방이 꽃>(조선문단.1925> <오호대나옹(嗚呼大奈翁)>(조선일보.1928.1.1.) <설야> <고적(孤寂)>
-------------------------------------------------------
진주시인 1호 김병호(金炳昊)
진주시인 1호는 김병호(金炳昊, 1904~1959)다. 그는 갑진년 11월 16일 하동읍 목도리(당시 진주부 소속)에서 태어나 진주시 평안동 201번지로 본적지 이동을 하게 된 시인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계림(鷄林), 필명은 탄(彈)이었다.
는 1925년(22세)에 경남 공립 사범학교 특과를 1회로 졸업하고 진주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출발한다. 사범 재학시절 엄흥섭(嚴興燮), 손풍산(孫楓山) 등과 더불어 시를 습작했고 같은 해 4월호 [조선문단]에 시 <안진방이 꽃>이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김병호는 1928년(25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오호대나옹(嗚呼大奈翁)>이 입선되고 이어 진주에서 8월에 시 전문지 [신시단(新詩壇)]을 엄흥섭, 김찬성 등과 발간하게 된다. 1920년대가 우리나라 문단의 동인지 시대인데 지방에서는 인천과 더불어 전국권 표방의 시지(詩誌)를 처음으로 낸 것인데, 그 꿈이 원대했던 것이고 그 기획이 예사롭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창간호는 일제 검열에 걸려 불발이 되었고 제2호가 곧 창간호였고, 또한 종간호가 되었다.
그는 [신시단]을 낼 때부터 계급주의 관점에 서 있었고 광복이 되던 해에 [조선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에 가담했고 1946년(43세)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진주지부장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광복 이후부터 보통학교 교장이 되어 진주를 떠나서 생활했으므로 진주에서 지속적인 문학운동을 펼칠 수는 없었다. 설창수 시인의 술회(<金炳昊에의 낡은 추모> 현대문학 1963년 1월호)에 의하면 그는 [영문]동인들과 사귀며 시내 다방에서 유유히 횡적(橫笛)을 불었고 또 어느 여인의 집 변두리를 소요하면서 달밤에 구슬프게 피리를 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황천(硫黃泉)의 세례(洗禮)>라는 시집 원고를 언제나 헌 책보따리에 싸 가지고 다녔고 시도 때도 없이 풀어서는 자가 낭독에 도취했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봉급은 참으로 쥐꼬리만한 것이었는지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모심는 데서 모밥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거기다 김병호는 방랑이 심하여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했으므로 늘 구차한 형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그는 지인들에게서 필요이상의 노자는 요구하지 않았었다고 설창수가 술회했던 것으로 보아 천상병 시인의 말기같은 면모를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한다.
광복 직후 11월의 어느 날 밤에 진주 문화건설대가 연극 <젊은 계승자>의 대사 연습을 마치는 순간이었는데 그곳으로 약간의 취흥에 젖은 김병호, 손풍산 두 시인이 나타났다. 대뜸 김병호는 설창수 등을 보고는 "후배가 선배를 찾아보지 않는 것이 되는 일이야?"하고 질책성 화두를 던졌다. 설창수는 이를 받아 "선배가 후배를 찾아와서 격려하여 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하고 응수했다. 노자 없이 몇 십리를 걸어온 취객이었기에 시장끼가 노기로 바뀌었던 것일까. 유리창이 깨지는 소동이 일었다는 것이다.
후에 설창수는 김병호와 뜻이 통해 김병호가 교장으로 근무하던 수곡국민학교로 약품과 주사약을 사서 휴양 겸하여 방문했는데 숙직실에서 4,5일을 보내다가 온 것이 그와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병호는 늘 좌천이 거듭되어 1954년(51세) 함양 백전면 소재 백전국민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신병으로 해임되었다. 그는 차남 영기(永基)가 있던 부산 범일동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거기서 민주일보 교열기자로 2년 정도 근무했다. 이후 4년간 그는 방랑을 거듭하다가 귀가했지만 1959년(56세) 위암으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유해는 부산 전포동 소재 황령산 시립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그가 쓴 작품은 밝혀진 현황으로는 시 78편, 동시 17편, 동화 2편, 비평 10편, 수필 5편, 민요 번역 1편, 과학문 18편, 기다 2편에 이른다. 시인으로서 그 활동 영역이 다채롭다 할 것이다. 그는 참으로 곤고한 삶을 살다가 생애를 끝냈으나, 문학적 생애는 지금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주 1호 시인은 1호답게 역사의 편년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잊혀진 시인 김병호를 지역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6년이었다. 필자의 손에 태학사가 펴낸 <한국동인지전집> 영인본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거기서 1928년 진주에서 발행된 [신시단(新詩壇)]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1920년대는 동인지 시대였고 지방에서는 그 후반기에 인천이 조금 먼저 동인지를 내었고 그 다음에 인쇄본으로서는 다른 데보다 앞서 진주가 동인지를 내게 된 것이었다. 필자는 몹시 흥분했다. 카프계열에 들어서 문단사 위에 오른 엄흥섭이 김병호와 같이 등장하는 것도 주목되었고, 문단의 미아가 되어 있는 진주고보의 소용수가 등장하는 것도 예사로 볼 일이 아니었다.
대충 [신시단]을 훑어본 뒤 진주MBC와 경남일보에 연락했다. 진주MBC에서는 당일 오후 3시 전국 네트웍 시간에 김종철 PD가 생방송으로 보도했는데 "오늘 진주 소식은 별 재미는 없는 것이지만 각별한 문학사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하고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 나갔다. 경남일보 문화부 하종갑 기자는 특종이라며 렌즈가 길게 빠져나오는 사진기를 들고 ‘신시단’을 심층 촬영하고 다음날 아침 문화면에 최특호 활자로 제목을 뽑아 주었다.
필자는 소루한 대로 <'신시단'의 의의>라는 제목으로 [문예] 77 가을호'에 소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진주문단사>(진주시사)와 <광복후 경남시문학의 흐름>(경남문학사)등에 [신시단] 관련 내용을 소개해 왔다. 그런 뒤 제법 세월이 흘렀다. 2천년대 들어 부산외국어대 박경수 교수가 김병호 시인 자료를 집성했다는 소문이 들렸고 이어 창신대 이상옥 교수가 연전 경남문학관에서 개최하는 경남시인 연구발표에 김병호 시인을 다루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해왔었다.
그러던 중에 최근에 박경수 교수의 편저 <잊혀진 시인, 김병호(金炳昊)의 시와 세계>(2004, 새미)를 접하게 되었다. 이 신간을 들고 필자는 [신시단]을 접했을 때에 버금가는 감회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 우선 박교수가 한없이 고마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